<항목 ID="GC04200524" 구분="일반" name="00459" 유형="일반항목" 레벨="6"> <항목명> <대표항목명><인명>문위열 <한글항목명>문위열 <한자항목명>文渭悅 <영문항목명> <음역>Mun Widong <중국어항목명> <메타데이터> <이칭별칭>아산(我山) <키워드>해수방지회|가락면협의회원|가락면민 대표위원|가락면장|가락중학교 <연계항목 /> <대표분야>문화·교육/교육 <대표유형>인물/인물(일반) <표준지역>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표준시대>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분야>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인물/인물(일반) <지역>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468 봉림 마을 <시대>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하유식 <상세정보 유형="성격">교육자|사회 운동가 <상세정보 유형="성별">남 <상세정보 유형="대표경력">가락면장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출생 시기/일시" 내용="출생" 비고="">1905년<시간 식별자="부산:문위열 출생" />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활동 시기/일시" 내용="낙동강일천시공사로 인한 해수 역류 우려 해수방지회 위원에 선정" 비고="">1933년 3월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활동 시기/일시" 내용="가락면민 대표 위원 14인 중 한 명으로 선출" 비고="">1934년 9월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활동 시기/일시" 내용="가락면 협의회원에 임명" 비고="">1939년 5월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활동 시기/일시" 내용="가락고등공민학교 설립" 비고="">1947년 9월 1일 <상세정보 type="시간" 유형="몰년 시기/일시" 내용="사망" 비고="">1970년<시간 식별자="부산:문위열 사망" /> <상세정보 type="공간" 유형="출생지" 명칭="" 내용="" 비고="" id="1"><지명>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봉림 마을 <의견> <관련항목 ID="GC04200609">일제 강점기 <본문> <소표제>[정의] <문단> <지명 검색어="" 검색="">부산 출신의 교육자이자 사회 운동가. <소표제>[개설] <문단> <인명 검색어="문위열" 검색="1" UCI="">문위열(文渭悅)은 1905년에 지금의 <지명 검색어="가락동" 검색="1">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봉림 마을에서 태어났다. 호는 <인명 검색어="" 검색="" UCI="">아산(我山)이다. <지명 검색어="" 검색="">서울 <기관 검색어="" 검색="">중동중학교와 <기관 검색어="" 검색="">경성법정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표제>[활동 사항] <문단> <인명 검색어="문위열" 검색="1" UCI="">문위열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3월 <지명 검색어="낙동강" 검색="1">김해 낙동강 주변의 <지명 검색어="" 검색="">대저, <지명 검색어="" 검색="">김해, <지명 검색어="" 검색="">녹산, <지명 검색어="" 검색="">가락의 4개 면민 대표자들이 <지명 검색어="가락면" 검색="1">가락면에 모여 낙동강 일천식 공사(洛東江一川式工事)로 인한 해수 역류가 우려되어 <기관 검색어="" 검색="">해수방지회(海水防止會)를 조직했을 때 위원으로 선정되어, 면민들을 대표하여 생존권 수호를 위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문단>또한 1934년 9월에 수재를 당한 1만여 명의 가락면민들이 면민 대회를 열고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고 군 당국에 요청할 때 가락면민 대표 위원 14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인명 검색어="" 검색="" UCI="">배차수·<인명 검색어="" 검색="" UCI="">김연성·<인명 검색어="" 검색="" UCI="">김정석과 함께 4인의 상경 대표로 선정되어, 직접 <기관 검색어="조선총독부" 검색="1">조선총독부를 방문하여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인명 검색어="문위열" 검색="1" UCI="">문위열은 1939년 5월에 실시된 읍면 협의회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어 <지명 검색어="가락면" 검색="1">가락면 협의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문단>해방 후 그는 <지명 검색어="" 검색="">조선식량영단 가락공장장, 가락면장, <기관 검색어="" 검색="">김해교육구청 교육위원, <지명 검색어="" 검색="">김해 향교 전교 등을 역임하였다. 1947년 9월 1일 현 <기관 검색어="가락중학교" 검색="1">가락중학교 전신인 <기관 검색어="" 검색="">가락고등공민학교를 창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 때 <지명 검색어="" 검색="">김해군 갑구에 출마할 것으로 언론은 예상했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면장을 역임한 후 독농가(篤農家)로서 농촌 사회 발전을 위해 적극 나섰다. <문단>1968년 10월 한 언론의 설문 조사에 응하여, 추곡 매입 가격이 생산 가격에 미달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농하는 농가가 속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식량 증산을 위해서는 비료 판매를 자유화하고 농우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70년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문헌> <서명>『강서구지』(<출판사항>강서구지편찬위원회, 1993) <문헌> <서명>『동아 일보』(<출판사항>1933. 3. 21) <문헌> <서명>『조선 중앙 일보』(<출판사항>1934. 9. 20) <문헌> <서명>『경향 신문』(<출판사항>1950. 4. 29|1968.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