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GC04205094" 구분="일반" name="04025" 유형="일반항목" 레벨="5"> <항목명> <대표항목명>개항기의 유교 <한글항목명>개항기의 유교 <한자항목명>開港期-儒敎 <영문항목명> <의미역>The Confucianism of the Busan in the Age of Civilization <중국어항목명> <메타데이터> <이칭별칭 /> <키워드>한말|영남|허전(許傳)|성재학맥 <연계항목 /> <대표분야>종교/유교 <대표유형>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표준지역>부산광역시 <표준시대>근대/개항기 <분야>종교/유교 <유형>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부산광역시 <시대>근대/개항기 <집필자>김영나 <의견> <관련항목 ID="GC04206348">유교<관련항목 ID="GC04206414">일제 강점기의 유교<관련항목 ID="GC04206512">조선 시대의 유교<관련항목 ID="GC04206811">현대의 유교 <본문> <소표제>[정의] <문단>조선 시대의 국가 이념이자 사회 이념으로 한말 <지명 검색어="" 검색="">부산 지역 사람들의 의식과 다양한 문화 형식 속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유교적 가치. <소표제>[개설] <문단>한말에는 정치적으로 외세에 의한 국권 상실의 위기가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지명 검색어="서구" 검색="1">서구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 때 유교 문화의 장래를 위해 여러 가지 타개책을 모색하였는데, <지명 검색어="" 검색="">영남 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던 남인들이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지명 검색어="" 검색="">영남 유림들은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는데, 외세에 대한 유학계의 대응이라는 점에서 <지명 검색어="" 검색="">기호(畿湖) 혹은 <지명 검색어="" 검색="">호남 지역의 위정척사론과 같이 하여 논리에서는 보편적이었지만 남인으로서의 정치적 한계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의병 항쟁에 선봉적인 역할을 하였다. <소표제>[영남 남부 지역의 학파] <문단> <지명 검색어="" 검색="">영남 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학파는 성재학파(省齋學派)이다. 이 학파는 <인명 검색어="" 검색="" UCI="">퇴계(退溪) <인명 검색어="이황" 검색="1" UCI="G002+AKS-KHF_12C774D669FFFFB1501X0">이황(李滉)에게 연원을 두면서도 근기 지역에서 실학을 일으켰던 <인명 UCI="" 검색어="" 검색="">성호(星湖) <인명 검색어="이익" 검색="1" UCI="G002+AKS-KHF_12C774C775FFFFB1681X0">이익(李瀷)의 학맥이 <인명 검색어="" 검색="" UCI="">성재(性齋) <인명 UCI="" 검색어="" 검색="">허전(許傳)에 의해 다시 <지명 검색어="" 검색="">영남에서 계승되어 학파를 이루었다는 특징이 있다. <인명 검색어="허전" 검색="1" UCI="G002+AKS-KHF_12D5C8BD80FFFFB1797X0">허전은 본래 <지명 검색어="" 검색="">경기도 포천 출신인데 1864년(고종 1) 68세 때 김해 부사로 부임하면서 <지명 검색어="" 검색="">영남에 성호학을 전하였고, 이로 인해 성재학파가 형성되었다. <문단>성재학파는 <인명 검색어="성호" 검색="1" UCI="G002+AKS-KHF_12C774C775FFFFB1681X0">성호 <인명 검색어="이익" 검색="1" UCI="G002+AKS-KHF_12C774C775FFFFB1681X0">이익의 실학적 맥락을 같이 하면서 형식적인 예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호학파이면서 남인으로서 <지명 검색어="" 검색="">영남의 <인명 검색어="" 검색="" UCI="">퇴계 학통을 계승하였다. 또한 실용적인 개혁론을 주장하였지만 <지명 검색어="" 검색="">서양 문물과 함께 서학이 유입되고 있는 현실을 유학의 위기로 간주하였고, 끝까지 척사적 벽이단론(闢異端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명 검색어="" 검색="">서양 문화 전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고, 실용적인 면에서는 인정하였다. <소표제>[성재학파의 활동] <문단> <인명 UCI="G002+AKS-KHF_12D5C8D6C8FFFFB1836X0" 검색어="허훈" 검색="1">허훈(許薰)은 <지명 검색어="" 검색="">선산 출신으로, 29세 때 <인명 검색어="허전" 검색="1" UCI="G002+AKS-KHF_13B178C751ADDCB1861X0">허전의 문하에 나아갔다. <인명 검색어="허훈" 검색="1" UCI="G002+AKS-KHF_12D5C8D6C8FFFFB1836X0">허훈은 다른 <인명 검색어="" 검색="" UCI="">성재 문인들과 달리 남명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95년 60세 때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지명 검색어="" 검색="">청송에서 창의하여 의병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병 운동은 <인명 검색어="허훈" 검색="1" UCI="G002+AKS-KHF_12D5C8D6C8FFFFB1836X0">허훈의 아우 <인명 UCI="" 검색어="" 검색="">허로(許魯)와 <인명 UCI="" 검색어="" 검색="">허위(許蔿)가 적극적으로 이어 갔으며, 자신은 동생들의 의병 운동을 뒤에서 도왔다. <문단> <인명 검색어="허훈" 검색="1" UCI="G002+AKS-KHF_12D5C8D6C8FFFFB1836X0">허훈의 아우 <인명 검색어="허위" 검색="1" UCI="G002+AKS-KHF_12D5C8C704FFFFB1855X0">허위는 1896년 <지명 검색어="" 검색="">선산에서 창의하여 <지명 검색어="" 검색="">김산·<지명 검색어="" 검색="">상주·<지명 검색어="" 검색="">선산·<지명 검색어="" 검색="">성주·<지명 검색어="" 검색="">개령 등지의 연합 의진인 <기관 검색어="" 검색="">김산 의진에 참가하였고, <지명 검색어="대구" 검색="1">대구로 진격하던 중 관군에 패퇴한 뒤 다시 창의하였다. 1899년에는 조정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지명 검색어="" 검색="">경기도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마침내 <지명 검색어="" 검색="">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기관 검색어="" 검색="">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인명 검색어="" 검색="" UCI="">허로 역시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강점기가 되자 <인명 검색어="허위" 검색="1" UCI="G002+AKS-KHF_12D5C8C704FFFFB1855X0">허위의 자식을 데리고 <지명 검색어="" 검색="">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다. <문단> <인명 검색어="장지연" 검색="1" UCI="G002+AKS-KHF_13C7A5C9C0C601B1887X0">장지연(張志淵)은 실학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애국 계몽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900년 37세 때 <기관 검색어="" 검색="">광문사(廣文社)의 편집 위원에 임명되자 <인명 UCI="G002+AKS-KHF_13C815C57DC6A9B1762X0" 검색어="정약용" 검색="1">정약용(丁若鏞)의 <서명 검색어="" 검색="">『목민심서(牧民心書)』와 <서명 검색어="" 검색="">『흠흠신서(欽欽新書)』를 먼저 간행하고, <인명 검색어="정약용" 검색="1" UCI="G002+AKS-KHF_13C815C57DC6A9B1762X0">정약용의 저작들을 연구하여 <서명 검색어="" 검색="">『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를 편찬하였으며 <서명 검색어="" 검색="">『성호 문집(星湖文集)』의 출판도 계획하였다. 그 뒤 <기관 검색어="" 검색="">시사총보사(時事總報社)와 <기관 검색어="" 검색="">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등의 주필을 거쳐 사장이 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서명 검색어="" 검색="">『황성신문』에 <서명 검색어="" 검색="">「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실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사장에서 물러난 뒤 <기관 검색어="대한자강회" 검색="1">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기관 검색어="" 검색="">대동학회(大同學會)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 후 <지명 검색어="죽성리" 검색="1">진주의 <서명 검색어="" 검색="">『경남 일보(慶南日報)』 주필을 맡게 되었는데, <인명 검색어="" 검색="" UCI="">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실었다가 <서명 검색어="" 검색="">『경남 일보』가 폐간되었다. 1913년에는 <인명 검색어="" 검색="" UCI="">다카하시 도루와 신문에서 ‘공자교와 유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1917년에는 <서명 검색어="" 검색="">『매일 신보(每日新報)』에 최초의 <지명 검색어="" 검색="">한국 유교 통사라 할 수 있는 <서명 검색어="" 검색="">『조선 유교 연원(朝鮮儒敎淵源)』을 총 125회 걸쳐 실었다. <문단> <인명 UCI="" 검색어="" 검색="">노응규(盧應奎)는 1896년 2월 19일에 의병을 일으켰다.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 등의 사건을 계기로 <지명 검색어="" 검색="">안의(安義) <기관 검색어="" 검색="">장수사(長水寺)의 승려 <인명 검색어="" 검색="" UCI="">서재기(徐再起)를 비롯해 <인명 검색어="" 검색="" UCI="">정도현(鄭道玄)·<인명 검색어="" 검색="" UCI="">박준필(朴準弼)·<인명 검색어="" 검색="" UCI="">최두원(崔斗元)·<인명 검색어="" 검색="" UCI="">최두연(崔斗淵) 등과 함께 창의 후 <지명 검색어="" 검색="">진주 향교로 들어가 관찰부를 습격·점령하였다. 이에 <지명 검색어="죽성리" 검색="1">진주에서도 <인명 검색어="" 검색="" UCI="">정한용(鄭漢鎔)·<인명 검색어="" 검색="" UCI="">오종근(吳鐘根)이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그 뒤 <지명 검색어="죽성리" 검색="1">진주를 거점으로 <지명 검색어="" 검색="">경상남도 남서 지역을 장악하였다. <인명 검색어="노응규" 검색="1" UCI="G002+AKS-KHF_13B178C751ADDCB1861X0">노응규는 <지명 검색어="" 검색="">김해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개항장 <지명 검색어="" 검색="">부산 침공을 시도할 만큼 <지명 검색어="" 검색="">경상남도 전역에서 그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인명 검색어="" 검색="" UCI="">정한용의 배반으로 <지명 검색어="" 검색="">진주성을 관군에게 빼앗기고, <지명 검색어="" 검색="">진주성 전투에서 서재기 등 여러 의병장이 전사함으로써 <인명 검색어="노응규" 검색="1" UCI="G002+AKS-KHF_13B178C751ADDCB1861X0">노응규의 <기관 검색어="" 검색="">진주의병진은 해산되었다. <참고문헌> <문헌> <저자>금장태, <서명>『한국 근대의 유교 사상』(<출판사항>서울대학교 출판부, 1989) <문헌> <서명>『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출판사항>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문헌> <저자>민족문화연구소 <서명>『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출판사항>영남대학교 출판부, 1998) <문헌> <저자>유준기, <서명>『한국 근대 유교 개혁 운동사』(<출판사항>아세아문화사, 1999) <문헌> <서명>『한국 유학 사상 대계』Ⅲ-철학 사상편(<출판사항>한국국학진흥원, 2005) <문헌> <저자>김종석, <서명>「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과 지역별 특징」(<출판사항>『국학 연구』4, 한국국학진흥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