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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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0015
한자 通信使
영어음역 Tongshins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한태문
[정의]
조선 시대 대일 기본 정책인 교린의 실현을 위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의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곧 중국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명(命)에 순응하는 예의로 ‘사대’를, 일본에는 신의(信義)와 인도(仁道)에 바탕을 둔 대등의 예의로 ‘교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역사적·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한 것으로, 대륙과 해양의 군사적 위협을 막고 생존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이와 같은 외교 정책의 실천은 중국으로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각각 조천사(朝天使)와 연행사(燕行使)를, 일본으로는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내용]
통신사는 표면적으로는 교린 외교 사절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인과의 문화 교류를 염두에 둔 문화 사절단이기도 하였다. 외교 사절단인 통신사를 문화 사절단으로 보기도 하는 것은 그 구성원의 면면에서 잘 드러난다. 곧 조선 조정은 일본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외교에 밝고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난 세 사신을 비롯하여, 제술관(製述官)·서기(書記)·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악대(樂隊)·마상재(馬上才) 등 한결같이 문학적 재능과 기예(技藝)로 당대를 대표하는 400~500여 명의 인원을 선발하였다.

통신사는 이와 같은 문화적 역량을 바탕으로 일본인과의 시문 창화(詩文唱和)와 필담(筆談)을 통한 문학과 학문의 교류를 비롯하여 서화(書畵)·음악·연희(演戱) 등을 포함한 예능 문화, 의복과 음식 등 생활 문화, 의술과 조선(造船) 등 기술 문화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결과 통신사는 진솔한 마음의 교류를 통해 상대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 상호 소통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는 국제 외교사에서 찾기 힘든 문화 사행(使行)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통신사의 전체 노정은 왕복 약 4,700㎞이며, 그중 약 1/5이 국내 노정이었다. 국내 노정은 세 사신을 비롯한 100명 남짓의 사행원이 왕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숭례문을 나오면서 시작된다. 사행은 ‘갈 때는 경상 좌도(左道)를 거쳐 가고, 올 때는 경상 우도(右道)를 거쳐 온다’는 규정에 따라 양재·판교·용인·양지·죽산·무극·숭선·충주·안보·문경·유곡·용궁·예천·풍산·안동·일직·의성·청로·의흥·신녕·영천·모량·경주·구어·울산·용당·동래를 거쳐 도일(渡日) 전 마지막 집결지인 부산에 이르렀다. 1763년(영조 39) 사행에 제술관으로 참여한 남옥(南玉)『일관기(日觀記)』에 기록된 국내의 전체 노정은 20일 동안 약 30개 지역으로 무려 440㎞에 달한다. 이틀을 머문 세 지역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26㎞를 이동한 셈이다.

왕명을 수행하는 사행인 만큼 국내 노정에는 전별연(餞別宴)과 해신제(海神祭) 등 공식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별연은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를 위로하는 잔치로 충주·경주·안동·영천·부산에서 열리다가 접대의 간소화로 1655년(효종 6) 통신사부터는 중간 집결지인 영천과 최종 집결지인 부산에서만 행해졌다. 경상도 관찰사가 주관한 영천의 전별연은 악공의 연주와 기생의 가무가 어우러진 조양각(朝陽閣)의 맞은편 남천 변에서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가 함께 베풀어져 지역 축제의 장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통신사의 일본 노정은 크게 수로 노정(水路路程)과 육로 노정(陸路路程)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수로 노정은 통신사가 통영에서 만든 4척의 배와 경상 좌수영에서 만든 2척의 배 등 총 6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평균 30여 일을 머물던 부산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일본 배의 안내와 호위로 쓰시마[對馬]·이키[壹歧]·아이노시마[藍島]·아카마가세키[赤間關]·가미노세키[上關]·도모노우라[韜浦]·우시마도[牛窓]·무로츠[室津]·효고[兵庫]를 거쳐 오사카[大坂]에 도착한 후 다시 일본 배로 갈아타고 요도가와[淀川]에서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오르는 약 1,310㎞의 노정이었다.

육로 노정은 이로부터 교토[京都]·히코네[彦根]·오가키[大垣]·나고야[名古屋]·시즈오카[靜岡]·하코네[箱根]·오다와라[小田原]을 거쳐 목적지인 에도[江戶]에 이르는 약 520㎞의 노정이었다. 특히 1636년(인조 14), 1643년(인조 21), 1655년 통신사는 일본 측의 권유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무덤이 있는 일광산(日光山)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부산은 일찍부터 대일(對日) 외교·무역의 중심지이었다. 15세기 초 조선에는 일본인들이 외교와 무역을 위해 한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인 왜관(倭館)이 부산포·제포·염포 등 세 곳에 있었으나, 1609년(광해군 1) 기유 약조(己酉約條)의 체결과 함께 부산 왜관 한 곳에서만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통신사는 대일 외교 사절이었기에 결국 왜관이 있는 부산이 그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부산은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행사인 전별연과 해신제의 개최지이기도 하였다. 경상 좌수사가 주관한 전별연은 경주·동래·밀양의 기생들이 저마다의 기예를 뽐내는 경연장이 되어, 예능인들의 기예 향상과 상호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도일을 앞둔 통신사영가대(永嘉臺) 앞에 해신을 모신 제단을 설치하고, 사행의 안전과 무사 항해를 기원하던 해신제도 베풀어졌다.

5일 전에 제삿날이 잡히면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이틀 동안 술·고기·파·마늘을 먹지 않았다. 문상(問喪)과 문병을 하지 않았으며, 하루 동안 목욕재계를 할 정도로 온 정성을 쏟았다.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여행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부산은 1차 집결지인 서울, 2차 집결지인 영천을 거쳐 하급 실무직인 선장이나 격군(格軍)·소동(小童)·소통사(小通事) 등이 보충된 사행원의 최종 집결지이었다. 더불어 통영과 경상 좌수영 등에서 만든 사행 선박의 건조 및 감찰, 일본에 보낼 국서와 서계(書契)의 대조, 사행 일정과 인원 조정, 각종 짐 검사와 봉인 등 최종 점검지로서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였다.

이처럼 통신사는 부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 국내 노정 중 부산 체류 기간은 짧게는 16일[1617(광해군 9)]에서 길게는 51일[1719(숙종 45)]로 평균 30일 정도이었는데, 이는 자연히 실무 외에 관광으로도 이어졌다. 그 결과 지역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킨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산을 소재로 한 다양한 시문(詩文)의 창작 동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변천]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신 행차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는 사행 명칭이 회례사(回禮使)·회례관(回禮官)·보빙사(報聘使)·통신사·통신관(通信官) 등 다양할 뿐만 아니라, 파견 대상도 막부 장군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구주(九州) 절도사를 비롯한 지방 호족에게까지 미쳤다. 그러나 계해 약조(癸亥約條)[1443(세종 25)] 이후로 막부 장군에게는 통신사를, 대마 도주에게는 경차관(敬差官)·치전관(致奠官)·선위사(宣慰使) 등을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중앙 관료로 구성된 정사·부사·서장관 등 삼사(三使)가 국서와 예물을 지참하고 막부 장군의 경조사나 왜구의 침입 금지 등 현안 해결을 위해 교토로 파견되었는데, 통신사 규정에 가장 근접한 최초의 사행은 박서생(朴瑞生)·이예(李藝)·김극유(金克柔) 등이 이끈 1428년(세종 10) 통신사이다.

통신사를 통해 상호 교린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새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국내 정치의 안정을 위해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강렬히 원하였고, 이에 조선 조정은 일본 국왕의 국서와 임진왜란 때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잡아 보낼 것을 국교 재개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1606년(선조 39) 일본의 국서와 왕릉을 훼손한 범인이 도착함으로써 마침내 조선 조정은 1607년(선조 40) 여우길(呂祐吉)이 이끄는 통신사를 파견하여 단절된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크게 교린 체제 모색기[1606~1624], 교린 체제 확립기[1636~1655], 교린 체제 안정기[1682~1763], 교린 체제 와해기[1811] 등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교린 체제 모색기의 통신사는 1607년, 1617년, 1624년(인조 2) 등 초기 세 차례의 사행이 해당된다. 이 시기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양국의 지배 권력 확립이라는 정치적 의의와 함께 임진왜란으로 와해된 상호 교린 체제의 회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신사의 방일(訪日)은 일본으로서는 도쿠가와 정권의 국제적 위용을 과시하고, 국내 제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막번 체제(幕藩體制) 존립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 조선 역시 붕괴된 내정(內政) 재건과 전쟁 포로들의 쇄환(刷還), 북방 변경의 방위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의 실정을 탐색하여 남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실리 외교적 측면은 이 시기 통신사 명칭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칭한 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교린 체제 확립기의 통신사는 1636년, 1643년, 1655년 등 세 차례의 사행이 해당된다. 이 시기 일본은 막부가 외교를 장악하여 조선과의 교섭 문서를 전담·작성하게 하는 이정암 윤번제(以酊庵輪番制)를 시행하고, 관백(關白)의 대외 호칭도 ‘일본국 대군(日本國大君)’을 사용하였다. 조선도 ‘통신사’ 명칭을 회복함으로써 일본 외교 체제의 쇄신을 직접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원당(願堂)인 일광산 동조궁(東照宮)까지 참배하는 등 적극적인 대일 관계에 나선 시기이다.

교린 체제 안정기의 통신사는 1682년(숙종 8), 1711년(숙종 37), 1719년, 1748년(영조 24), 1763년 등 다섯 차례의 사행이 해당된다. 이 시기는 조선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삼국이 안정을 유지한데다, 앞선 사행과 달리 일광산 치제(致祭)가 일본 측의 요구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 결과 제문 창작과 독축(讀祝)을 담당하던 ‘독축관(讀祝官)’이라는 사행 직명이 ‘제술관’으로 바뀌는 등 문화적인 색채가 강화되어 문화 교류가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교린 체제 와해기의 통신사는 1811년(순조 11) 사행이 해당된다. 이 사행은 사행 목적지가 쓰시마에 한정되고, 종사관(從事官)이 제외되는 등 수행원의 격감은 물론, 양국의 문화 교류가 이전 사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된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통신사는 수많은 인원이 수개월에 걸쳐 일본 지역을 왕래함으로써 좁게는 양국의 선린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넓게는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사이었다. 그것은 통신사가 양국의 공식적인 외교 창구로서의 기능 외에 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원활히 하여 상호 이행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모두에게 자국 문화에 대한 자각과 주체성 확립의 계기가 되었고, 새로운 인재의 발굴과 자기 고양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상호 소통의 전통을 확립함으로써 상대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통신사 관련 문예물의 양산으로 양국 문화 창성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일 문화 교류사적으로 의의가 깊다.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사무국은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13차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의 심사를 거쳐 통신사 기록물 총 111건 333점 기록물(한국 63건 124점, 일본 48건 209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최종 등재가 결정되었다. 이번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결정된 통신사 관련 기록물은 과거 200년이 넘게 지속되었던 한·일간 선린우호의 상징물로서 향후 인류가 계속적으로 보존해야 할 기록유산으로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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