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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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0086
한자 安樂書院
영어의미역 Allak Neo-Confucian Academy
이칭/별칭 충렬사 안락서원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안락동 83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성격 서원
    소유자 부산광역시청
    관리자 충렬사 관리사무소
    건립 시기/일시 1605년연표보기 - 송공사로 건립
    이전 시기/일시 1652년 - 동래 부사 윤문거가 충렬사를 내산 밑 안락리로 이전
    훼철|철거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호국의 요람지’로 확장 정화되면서 사라짐
    개축|증축 시기/일시 1652년 -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칭함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24년 - 송공사를 ‘충렬사(忠烈祠)’라고 사액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2년 6월 26일 - 충렬사,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
    현 소재지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던 조선 후기의 서원.

[위치]
안락서원(安樂書院)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 충렬사(忠烈祠) 내에 위치하였다.

[변천]
안락서원은 1605년(선조 38) 동래 부사 윤훤(尹喧)이 동래 부사 충렬공 송상현(宋象賢)을 모시기 위하여 송공사(宋公祠)를 세운 것이 시초가 되었다. 뒷날 1624년(인조 2)에 송공사를 충렬사라고 사액(賜額)하고, 부산 첨사 충장공 정발(鄭撥)을 함께 모셨다. 이후 1652년(효종 3)에는 동래 부사 윤문거(尹文擧)송상현의 학행과 충절을 높이고 선비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하여 충렬사를 내산(萊山) 밑 안락리에 옮기고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 서원이라 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송상현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사절(死節)한 여러 사람들을 같이 모시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충렬사의 옛터에 별사를 세웠다. 그리고 조정에 알린 후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동래 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및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을 모셨다.

1735년(영조 11)에는 경상 감사 민응수(閔應洙)의 계청으로 그 이듬해에 별사를 없애고 여기에 모신 여러 사람들을 안락서원충렬사에 함께 모셨다. 동시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을 다시 모시고 또한 임진왜란을 당하여 운명을 같이한 송상현의 첩 금섬(金蟾)정발의 첩 애향(愛香)충렬사의 동문 밖에 별도로 각(閣)을 지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안락서원임진왜란 때의 충신·열사들을 모셨기 때문에 1864년(고종 1)을 전후한 시점에서 흥선 대원군이 서원의 폐단을 통감하고 철폐를 단행하였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근년까지 그대로 내려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원에서의 교육과 함께 동래의 유림에 의해 매년 2월과 8월에 봉행되던 제향이 민족정기를 북돋운다고 하여 일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방해를 가하였다. 따라서 이후 서원과 사우(祠宇)[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집]는 보수하지 못하고 낡아 허물어져 갔다. 이후 1977년 정부가 ‘호국의 요람지’로 확장 정화하면서 수백 년 이어 온 안락서원의 본래 모습은 흔적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현황]
현재 안락서원충렬사로 변모하였다. 부산 지방에서 순절한 모든 선열의 위패는 직책 또는 증직(曾職)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으며, 총 92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는 (재)충렬사 안락서원에서, 매년 5월 25일에는 부산 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안락서원은 유교 성리학의 전통 확립과 관련한 순수 교육적 기능보다는 충신열사를 배향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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