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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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0228
한자 子城碑
영어의미역 Jaseong Memorial Ston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590-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성격 비|공덕비
    관련인물 만세덕(萬世德)|권이진(權以鎭)
    건립 시기/일시 1599년연표보기 - 자성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710년연표보기 - 자성비 보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09년 3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권이진이 발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09년 1월연표보기 - 권이진 동래 부사 부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11년 4월연표보기 - 권이진 동래 부사 퇴임
    원소재지 자성대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0-5[추정]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였던 만세덕(萬世德)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1709년(숙종 35) 3월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부산(釜山)에 올라갔다가 풀 속에서 부러진 비석을 발견하고, 그것이 명나라 장수 만세덕의 전공(戰功)이 새겨진 것임을 알고 이를 보수하여 세웠다. 권이진은 구리를 부어 끊어진 곳을 이은 후 돌기둥을 세우고 화량(畵樑)과 공포(栱包)를 올리고 지붕을 덮어 옛 자취가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였다. 또 비문과 비음기(碑陰記)를 판자에 새겨 비석 글자가 흐려지는 것을 막았다. 비를 보수한 날짜는 만력 기해 후 111년 경인년[1710]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원래 비는 1599년(선조 32)에 건립된 것이다.

여기에는 비를 새로이 보수하여 건립한 경위를 밝힌 권이진의 기문(記文)이 있고, 비문에는 정유재란 때 경리(經里) 만세덕이 지휘한 명군의 활약상을 수록하면서 명나라 황제의 덕을 함께 칭송하였다. 그리고 비신(碑身)의 뒷면에는 당시 참전한 명군의 장수 58명의 명단이 9개 직책별로 새겨져 있다.

[위치]
자성비(子城碑)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0-5번지 자성대(子城臺) 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현재는 비가 전하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자성비(子城碑)’이며,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명 만력 기해년 8월 상순에 경리 대중승(大中丞) 만세덕 공은 황제의 원정 명령을 받고 조선에 와서 왜인의 기운을 쓸어 내고 조선을 지켜 주었다. 가을이 되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가, 동해에 이르러서 대장군 이승훈(李承勛)과 함께 문무 장리(文武將里)들을 거느리고 부산의 언덕에 올라 크게 탄식하고 말하였다. ‘오호라 아름답도다. 성스러운 어지심과 신통한 무예로 향기를 남기셔서 여기에 이르렀도다.’ 이에 외사씨(外史氏) 전병부직방사랑중(前兵部職方司郞中) 계문(薊門) 가유약(賈維鑰)에게 임시로 임무를 주어 그 일을 서술하게 하여 명을 지어 말한다.

대개 조선은 내부(內附)하여 제후의 나라로 칭하여 온 지가 함께 오래되었는데, 무도한 왜노가 그 산천에 독을 퍼뜨리자 종묘는 허물어져 폐허가 되고 노인과 어린이는 골짜기에 모두 굴러 떨어져 조선의 강토가 흔들리니 그 형상이 매우 참담하였다. 천자가 민망하게 생각하여 천자의 군대를 주었으니 강을 건너 평양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왜의 관백(關白)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교활하게 거짓으로 얼굴을 바꾸어 명나라의 봉작을 구걸하니 조정에서는 그 정성을 미루어 먼 나라를 회유하려는 생각으로 이 말을 믿고 봉작을 내렸다.

그런데 사절이 돌아오자마자 맹세한 것을 저버리니 이것이 어찌 묘족(苗族)이 순임금에게 거역하고 귀방(鬼方)인 은나라를 배반하고 험윤(玁狁)이 주나라를 어지럽힌 것과 다름이 있겠는가? 황제가 크게 노하여 의리상 반드시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사마(大司馬) 형개(邢玠) 공을 총독제군사(總督諸軍事)로 삼고, 참정(參政) 양호(楊鎬) 공을 발탁하여 어사중승(御使中丞)으로 삼아 조선을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얼마 후 행간의 일로 서로 맞지 않아 떠나고 만공(萬公)이 천진(天津)에서 옮겨 와 진무(鎭撫)하니 총애하는 명령이 매우 융숭하였고 맡은 책임도 더욱 무거웠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출정을 중요하게 여겨서 네 사람의 대장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귀(麻貴) 장군과 동일원(董一元) 장군은 계요운곡(薊遼雲谷)의 보기병(步騎兵) 정예 군사를 끌고 오고, 유정(劉綎) 장군과 진린(陳璘) 장군은 오월민촉(吳越閩蜀)의 주륙(舟陸)의 뛰어난 자를 데리고 왔다. 병기를 검사하는 것은 좌우도참정(左右道參政) 왕사기(王士琦)와 참의(參議) 양조령(梁祖齡) 등이 하였고, 성곽을 맡아 힘을 다하는 일은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 등이 맡았다.

각기 유사(有司)가 있어 서로 업무를 도왔는데, 오직 어사(御使) 진공(陳公)만이 몸소 천자의 특별한 명령을 받아 군율을 다스렸다. 아! 주나라의 금위군처럼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고 온갖 직책이 구비되니, 구름과 같고 숲과 같아 『시경(詩經)』의 태원(太原)에 출정하는 군사나 한나라 주아부(周亞父)의 세류(細柳)의 진영이 이보다 엄숙하겠는가? 이에 날짜를 정하여 군사들과 맹세하고 사방으로 다투어 진군하면서, 징을 울리니 빈 골짜기에서 천둥이 진동하고 돛을 올리니 태양이 파도에 씻겼다. 대항하는 자를 치니 몸통이 뚫렸고 매달린 자를 밀치니 궁지로 떨어졌다.

당낭거철(螳蜋車轍)처럼 팔을 휘두르는 자는 기름진 이 땅에 목을 내놓았고,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슬프게 고향을 그리던 자는 부상한 몸을 부축해 밤에 도망갔다. 바다에서 베고 산에서 섬멸하니 시체를 쌓은 무덤이 산더미 같았고, 잔악한 자를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니 바다에는 바람도 맑았다. 위로는 구중궁궐의 황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팔도의 신인(神人)의 울분을 풀리게 하니 사직(社稷)의 황폐함을 노래하지 않고 재난을 끝내고 편안히 모여 사는 노래가 나왔으니 정말로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다.

국가의 은덕이 먼 지방에 미치게 되자 위엄이 해 뜨는 지역까지 더해지게 되었으니 삼광(三光)이나 오악(五嶽)과 비교해 보더라도 어찌 이것보다 더하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봉산(封山)에서 돌을 캐어 이름을 새겨 커다란 공로를 밝혀서 무궁한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 그 말은 이렇다.

황제의 어지심이 먼 이곳까지 덮어 편안하게 하였는데 이 흉악한 올빼미 무리가 조선을 침범하였다. 이에 황제의 군대를 정비하여 막아 주고 정벌하노라. 짐승을 잡듯이 적들을 잡으니 누가 선봉을 거역하리요? 생존한 자를 거두고 약한 자를 보살피니 조선이 조용해졌고, 먼 곳은 복종하고 가까운 곳은 회유하니 사방이 교화되었다. 저 높은 바위를 바라보듯 천자의 위엄이 빛난다. 저 바닷물을 따르듯, 이렇게 황제의 덕은 망극하다. 손 모아 절을 하고 돌에 새겨 큰 공적을 밝히니, 천년만년 동안 영원히 왕국(王國)을 바치노라

[子城碑. 維明皇萬曆 歲在屠維淵獻之次 八月上浣 經理大中丞 萬公世德 受命專征 至于三韓 廓淸倭氛 保定屬藩 乘秋南獮 放于東海 遂偕大將軍李公承勛 率文武將吏 登釜山之巓 而喟然歎曰 於鑠哉 聖仁神武 丕揚流鬯 一至于斯乎 乃授簡外史氏 前兵部職方司郞中 薊門賈維鑰 叙其事而銘之曰 盖維朝鮮內附 稱藩與國同久 倭奴不道 螯其山川 宗廟鞠爲丘墟 旄倪俱轉于丘壑 箕封板蕩 狀極慘楚 天子悶而授之王師 渡江平壤克捷 關酋懼禍 狡僞革面 乞受命封 朝廷推誠柔遠 是信是予 顧使節甫旋 盟寒口血 是奚異夫 有苗之逆虞 鬼方之負殷 玁狁之猾周者哉 天怒震疊 義在必討 以大司馬邢公玠行總督諸軍事 擢參政楊公鎬 爲御史中丞 經理朝鮮 亡何以行間事齟齬去 而萬公自天津移鎭焉 則寵命郅隆 肩任益鉅矣 先是朝廷鄭重關役 頒四大將軍印綬 於是麻將軍貴 董將軍一元 以薊遼雲谷步騎之銳 至劉將軍綎 陳將軍璘 以吳越閩蜀 水陸之雄 至簡詰兵戎 則左右道參政王士琦 參議梁祖齡 副使杜潛 而督餉則民部郞董漢儒 有專責焉 至于守職獻宣猷 則運同吳良璽等分陴 戮力則副摠兵解生等 各有司存 共襄機務 惟是御史陳公效 躬膺特簡 以繡斧按治弗戒 吁嗟乎 七萃賅 百職備 如雲如林 太原之戎 細柳之屯 庸詎肅於斯耶 於是克日誓師 四路競進 擊斗 則空谷翻雷 揚帆 則洪濤浴日 搗抗中竅 排縋斯窮 奮螳臂者 授首膏原 悲狐丘者 扶傷夜遁 海截山殲 京觀岳峙 除殘拓境 水國風淸 上以紓九重霄旰之憂 下以洩八道神人之憤 黍離不作 鴻雁興謠 猗歟至矣 國家德濡窮壤 而威加日出之域 考鏡三五 曷以加焉 因封山刊石勒名 以昭鴻烈 以示無窮其辭曰 維皇仁覆 怙遐荒兮 蠢玆凶梟 侵侯疆兮 爰整六師 以遏徂征兮 執禽獲醜 孰逆顔行兮 取殘植弱 靜海邦兮 讋遠柔邇 風四方兮 瞻彼嶄巖兮 天戚有赫 酌彼溟渤兮 帝德罔極 拜手題石兮 揮昭鴻烈 萬世千秋兮 永奠王國].”

[의의와 평가]
자성비의 내용을 통해 임진왜란 후반기, 즉 정유재란 당시의 명나라 군의 활동상을 이해할 수 있고 당시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의 명단을 세부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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