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영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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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0344
한자 絶影島鎭
영어의미역 Jeolyeongdo-jin Garris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중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개항기 절영도에 있던 수군첨절제사영.

[제정 경위 및 목적]
개항 이후 일본인이 사용할 신탄(薪炭)[장작과 숯]의 수효가 늘자 일본은 절영도의 나무를 베어 충당하겠다고 청원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청을 거부하고, 외국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 1881년(고종 18) 절영도진(絶影島鎭)을 설치하였다.

[관련 기록]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18년 신사조에 “병조가 아뢰기를, ‘절영도 첨사(絶影島僉使)를 부산(釜山) 다대포(多大浦)의 예에 따라 차출하는 일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복계(覆啓)에 대해 윤허하셨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승정원일기』 고종 20년 계미조에 “병조가 아뢰기를,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의 초기(草記)에 따라 다대진(多大鎭)이 겸대하던 감목관을 절영도 첨사에게 겸대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절영도진 수군첨절제사 겸 동래 감목관(絶影島鎭水軍僉節制使兼東萊監牧官)으로 하비(下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내용]
절영도 첨절제사영은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중리에 있었다. 절영도진이 설 때 부산에는 부산포진 등 7곳의 진영이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옛 초량 왜관일본 전관 거류지가 되자 일본인의 수가 늘어났고, 이와 함께 신탄의 수요도 많아졌다. 조선은 일본의 신탄 제조 요청을 거절하고, 외국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 목마장을 모지포로 옮기고, 개운포진·서평포진·모리진을 폐지하고 부산의 문호를 지키기 위해 절영도진을 설치하였다. 절영도진의 첨사를 지낸 사람은 13명이며, 임기는 1년 내외이었다. 마지막 첨사는 부산의 선각자 박기종(朴琪宗)이었다. 절영도진은 강력한 수군 첨사영이 되었다. 진영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창원, 칠원, 웅천, 김해 등 각 읍의 방전(防錢)으로 충당하였다.

[변천]
절영도진은 1881년에 설치하여 운영되다가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 이후 혁파되었다.

[의의와 평가]
절영도진은 개항 이후 부산에 출입하는 외국 선박을 감시하기 위해 이미 있던 개운포진, 서평포진, 모리진을 없애는 대신 새롭게 만든 수군의 진영이다. 개항으로 바뀐 수군 체제의 변화상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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