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방직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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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0855
한자 朝鮮紡織總罷業
영어의미역 General Strike at Joseon Textile Company|Joseon Textile Factory Strik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지아

    [상세정보]

    성격 사회 운동
    관련인물/단체 이종식|김만기|윤태준|김소임|임종업|김시엽|윤달선|문길환|중락회|신간회 부산지회|부산청년동맹|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조선방직주식회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 1월 10일연표보기 -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30년 1월 21일연표보기 - 종결
    발생|시작 장소 조선방직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종결 장소 조선방직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정의]
1930년 1월 부산 지역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노동력 수탈과 민족 차별에 항거하여 벌인 총파업.

[역사적 배경]
1917년 11월에 설립된 조선방직주식회사[약칭 조선방직, 조방]는 조선의 값싼 공업 원료와 저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대표적인 노동 집약형 기업이었다. 조선방직은 일본 미쯔이[三井] 계열의 중외산업(주)과 우마꼬시[馬越恭平], 야마모토[山本條太郞] 등이 자본금 500만 원을 출자하여 지금의 자유 시장 일대 13만 2000㎡[4만여 평]에 세웠다. 지금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일대를 ‘조방 앞’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방직은 근대 시설을 도입한 국내 최초의 방직 공장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했지만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노동 쟁의가 자주 발생하였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1년 동안 6차례의 대규모 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12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 시간과 낮은 임금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방직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같은 노동을 하는 일본인 남성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그나마 벌금제와 강제 저축, 기숙사비 등으로 임금은 다시 줄었으며, 1930년 들어 세계 대공황의 타격으로 임금이 깎이면서 이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졌다.

[경과]
조선방직 총파업은 1930년 1월 10일 오전에 시작되었다. 파업을 주도한 것은 조선방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중락회(衆樂會)였다. 중락회 회장인 이종식(李鍾植)과 부회장 김만기(金萬基)가 회사에 대한 12개 항의 요구 조건을 주창하자 2,000여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일시에 파업에 동참하였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임금을 80전으로 인상할 것,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해고제 폐지, 취업 중 부상자에 대한 위자료 지불, 직공에 대한 벌금제 폐지, 식사 개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대우 폐지 등이었다. 이 파업에는 화요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가들과 부산 지역의 사회단체가 지원하고 참여하였다. 이 무렵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조선방직은 이 가운데 화요계의 움직임과 연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업이 발생하자 일제 경찰은 신속하게 공권력을 투입하여 탄압을 자행하였다. 파업 초기에 이종식과 김만기 등 파업 지도부를 검거하는 한편 노동자의 절반이 거주하는 기숙사의 출입문을 폐쇄하고 이들을 감금함으로써, 파업 대열을 분리시켰다. 이에 파업 노동자들은 자성대 아래에 파업 본부를 마련하고 새로이 파업 지도부를 꾸렸다.

이때부터 화요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의 부산 책임자 이영조(李永祚)와 조선방직 노동자 윤태준(尹泰俊)이 파업을 주도하였다. 파업 지도부는 신간회 부산지회, 부산청년동맹 등 지역 사회단체를 비롯하여 전국의 노동 단체·사회단체와 연대를 강화하고,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동래, 김해, 마산, 경성, 원산, 평양, 홍원 등 전국 각지에서 격문 배포, 위문금과 격려문 전송, 비판 연설회 개최, 동정 파업, 조업 단축 등 조선방직 파업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조선방직 관리자들과 일제 경찰의 대응은 강경하였다. 이들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를 회유 협박하고, 수백 명의 노동자를 검거하고 해고하였다. 기숙사에 감금된 여성 노동자에게는 불법적인 감금과 비인간적인 처우에 항의하며 이들이 탈출을 시도하자, 한겨울임에도 소방용 펌프로 물을 뿌려대는 무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학대와 굶주림을 견디며 단식으로 저항하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소식으로 지역 사회에는 동정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에 여성 노동자 기숙사는 일약 조방 파업의 메카로 떠올랐다. 1월 18일 통근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 본부 부근에 따로 ‘여공 파업단’ 사무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결과]
조선방직 총파업은 일제 경찰과 조선방직 자본가의 악랄한 술수와 강력한 탄압으로 큰 희생을 치르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2차에 걸친 교섭에서 조선방직 측에서 제시한 작업 도구의 무료 지급, 벌금제 폐지, 식사 개선 등의 3개 조항만을 수용하는 타협안이 관철되면서 파업 10여 일 만인 1월 21일 대부분 노동자가 업무에 복귀하였다. 그 대가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가운데 400명 이상이 해고되고, 주동자들은 검거되거나 격리되어 김소임 등은 강제 귀향 조처되었다. 임종업(林鍾業), 김시엽(金時燁), 윤달선(尹達善), 문길환 등 조선방직 파업을 지원한 지역 활동가는 체포 구금되어 실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방직 총파업은 1929년 이후 세계 대공황의 어려운 경기 속에서 일어난 국내 최대의 파업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민족 차별과 계급 착취, 인권 유린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일제의 악랄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방직 총파업은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민족 차별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역량을 일제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선방직 총파업에서는 여성 노동자의 강한 단결력이 부각되었다. 파업 투쟁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이 고양되면서, 조선방직 총파업은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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