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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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041
한자 釜山美國文化院防火事件
영어의미역 Arson at the U.S. Cultural Center in Busan
이칭/별칭 부미방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2가 2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 운동
    관련인물/단체 문부식|김은숙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2년 3월 18일연표보기 -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88년 12월연표보기 - 관련 구속자 석방
    발단 시기/일시 1980년 5월 18일 - 5·18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전개 시기/일시 1981년 4월 1일 - 문부식, 김은숙 자수
    발생|시작 장소 부산 미국문화원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2가 99
[정의]
1982년 5·18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한 사건.

[역사적 배경]
부산 미국문화원 사건의 배경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군부의 유혈 진압과 그것을 묵인, 방조한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이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에서 현장을 보고 계엄군의 만행을 유인물을 통해 알리기 위해 투쟁해 온 김현장(金鉉奬)이 1981년 가을 문부식(文富軾) 등 부산의 학생들에게 5·18 민주화 운동의 참상과 미국의 책임을 이야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경과]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의 고신대학교 학생 문부식의 지휘 아래 김은숙, 이미옥, 최인순, 김지희 등이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의 미국문화원에 방화하였다. 같은 시각 유승렬, 박원식, 최충언 등은 부근 건물에서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와 “살인마 전두환 북침 준비 완료”라는 제목의 두 가지 유인물을 뿌렸다. 이 방화로 동아대학교 학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여론 몰이를 통해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사건 발생 14일 만인 4월 1일 주모자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하였고, 이어 경찰은 방화자 3명과 전단 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을 같이 한 3명 등 11명을 검거하였다. 다음날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김현장을 체포하는 한편, 원주교육원장 최기식(崔基植)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 은닉 혐의로 구속하였다. 최기식 신부의 구속을 둘러싸고 정권과 보수 언론 그리고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재야 세력이 공방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과]
재판에서 문부식과 김현장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김은숙 등은 무기형을, 나머지 학생들은 유기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1988년 12월에 사건 관련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반미(反美) 운동의 무풍지대에서 격렬한 형태로 발생한 반미 운동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물론 온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방화라는 방식과 사상자가 발생한 점에서 시민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점이 있긴 했지만, 이 사건으로 진보적 인사들 사이에서만 이야기되던 5·18 민주화 운동과 미국의 책임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대외 정책을 제국주의로 파악하는 시각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민주화를 위해서 반드시 자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이후 1980년대 대학생들의 반미 시위, 1985년 전국학생총연맹[전학련] 소속 대학생들에 의한 서울 정동 미국문화원 농성 사건 등이 일어남으로써 이 사건은 반미 운동의 효시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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