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성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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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239
한자 多大浦城-
영어음역 Dadaeposeong-teo
이칭/별칭 다대포성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로529번길 38-5[다대동 18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성격 성곽 터
    관리자 부산광역시 사하구청
    건립 시기/일시 1490년연표보기 - 다대포성 건립
    소재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81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조선 전기 경상 좌도의 수군 진성 터.

[개설]
조선 초기에는 다대포진이 장림포(長林浦)에 있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축성이 있었다. 1490년(성종 21) 11월에 다대포성이 축조되었는데, 규모는 둘레 541.8m, 높이 3.9m의 석성으로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다. 병선 9척으로 수군 723명이 수비하였다. 다대포성의 최고 직위는 세종(世宗) 이후 정4품의 장관인 만호영(萬戶營)이었다가 임진왜란 이전에 첨사영(僉使營)으로 바꾸었다. 조선 팔도 가운데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임명된 곳은 다대포와 조선과 만주 국경에 설치된 만포진(滿浦鎭) 두 곳뿐이었는데, 무관으로서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이 관직은 수군절도사와 동격이었다. 이와 같이 다대포영은 국방의 요새지로 가장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변천]
1589년(선조 22) 성지를 보수, 신축하여 둘레가 561m로 증축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가 다시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1895년(고종 32)의 기록에는 둘레 575.4m라고 적혀 있는데, 그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다대포성 터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81번지 일원으로 다대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성벽이 둘러쳐져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성벽은 외벽 높이가 1.6m 정도 잔존하며, 가로 50~70㎝, 세로 40~50㎝ 크기의 안산암 또는 역암의 할석을 10㎝ 내외 크기의 잔돌로 틈새 없이 끼워 축조하였다. 내벽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외벽에서 성내 쪽으로 7m까지 성석이 보이고 있는데, 외벽에서 안쪽으로 2m 지점이 외벽과 동시에 축조된 듯하다. 흘러내린 석축 위로 3.3m, 4.3m, 6.3m 지점에서 막쌓기[돌을 층지어 바르게 쌓지 아니하는 방법]한 석축이 계단상으로 보이고 있어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에서 안쪽으로 3.3m 지점에서부터 다시 흙을 채운 흔적이 있는데, 이 토층은 현재 노출된 석축의 상부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다져져 있어 계단상의 성벽 위로 황갈색토와 흑갈색 점질토를 피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벽 쪽 석재의 바닥에서 외벽 최상부까지의 높이는 2.5m로, 석축의 상태나 범위로 볼 때 전체 성벽의 너비는 5m 전후로 추정된다. 한편 현재 성내에서 수습된 유물은 소량의 인화문 분청사기편, 백자편, 암키와와 수키와편, 상평통보 등이며, 자기편의 경우 백자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현황]
다대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쪽과 남쪽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대부분 주택의 축대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대초등학교 안에 있었던 다대진 동헌(多大鎭東軒)은 현재 몰운대 공원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초기 경상 좌도 부산포진 관할의 수군 진성으로서 낙동강 일대의 해안 방어를 하는 데 최일선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때 다대포 진성 전투로 유명한 윤흥신(尹興信)과 그 아우 윤흥제(尹興悌)의 사적(事跡)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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