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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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276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기섭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부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 시대 부산은 도읍지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남쪽 변방의 한 지역이었다. 고려 초 부산은 동래현(東萊縣), 동평현(東平縣), 기장현(機張縣) 등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고을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으로, 동평현은 양주[현 양산시]에, 동래현과 기장현은 울주[현 울산광역시]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통일 신라 때만 해도 부산의 동래군(東萊郡)은 태수가 파견되는 동남쪽의 중심 고을로서,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다진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부산 태종대를 순수(巡狩)하기도 하였다. 고려 초기 부산이 행정적으로 소외된 것은 후삼국의 쟁패 기간 동안 후백제 견훤(甄萱)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과 관계가 깊다.

정치적 혼란기인 신라 말·고려 초는 신라를 차지하기 위해 후고구려의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이 각축을 벌였던 시기다. 견훤은 고려가 신라와 손잡는 것을 막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여 920년(태조 3) 무렵 합천과 진례 지역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이즈음 부산은 견훤의 세력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高麗史)』 권1, 926년(태조 9) 8월 조의 “견훤이 사신을 보내 절영도(絶影島)의 명마를 바쳤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부산 영도의 옛 지명인 절영도의 절영(絶影)은 명마가 빨리 달려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는 의미로, 절영도가 명마를 생산하던 목마장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견훤왕건은 한반도의 주인이 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견훤이 명마를 선물하기 한 달 전 왕건은 조물성 전투에서 패하여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이런 때에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를 보낸 것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행위로, 부산 지역이 자신의 휘하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계산도 담겨 있었다. 이즈음 견훤 세력은 청주(菁州)[지금의 진주]를 장악하고 부산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견훤은 부산 지역을 교두보로 삼아 927년(태조 10)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고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인 김부(金傅)경순왕(敬順王)으로 앉혔다. 부산 지역의 토호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이 시기에 견훤의 세력 하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행정 구역]
고려 전기의 행정 구역은 전국을 5도 양계(兩界)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주현(主縣)과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는 속현(屬縣)으로 구분하였다. 주현으로는 경(京), 도호부(都護府), 목(牧) 등의 계수관(界首官) 지역과 현(縣)이 있으며, 주현에는 속군, 속현 이외에 향·소·부곡·진·역 등 부곡제(部曲制) 지역이 있었다. 중앙 정부의 명령 전달 체계는 지방관을 통해 주현에 전달하는 것과 계수관을 통해 지방을 통제하는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속군과 속현 그리고 부곡제 지역은 주현의 통제를 받았다.

오늘날 부산의 일부인 동래 지역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대에 독립된 행정 구역인 동래군이었으며, 동평현[지금의 당감동 일대]과 기장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고려 초에도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의 위치를 누렸으나 1018(현종 9) 울주의 속현인 동래현으로 재편되고, 기장현도 울주의 속현이 되었다. 동평현은 양주에 예속되었다.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동래현이 속현으로 강등된 것은 부산 지역이 후삼국 때 견훤 세력의 거점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 고적 조에 의하면, 동래현에는 4개의 부곡과 1개의 향이 있었다. 고지도 부곡(古智道部曲)·조정 부곡(調井部曲)·형변 부곡(兄邊部曲)·부산 부곡(釜山部曲), 생천향(生川鄕)이 그것이다. 고지도 부곡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부산진 앞바다의 고지도라는 섬에 있었다. 조정 부곡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조정언 비(調井堰卑) 가 있는 곳, 형변 부곡신선대가 있는 남구 용당동 일대, 부산 부곡은 지금의 부산진 지역, 생천향은 지금의 대연동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다. 기장현에도 4개의 부곡이 있었는데 고촌 부곡(古村部曲)·결며 부곡(結旀部曲)·사량촌 부곡(沙良村部曲)·사야 부곡(沙也部曲)이 그것이다.

고려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 부곡을 운영하였는데, 학계에서는 토지와 호구(戶口)가 현(縣)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설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밖에 기능에 따라 나눈 소(所)·진(津)·역(驛)·장(莊)·처(處) 등의 특수 행정 구역이 있었다. 고려 시대의 역으로는 동래현소산역(蘇山驛)과 기장현의 아등량역(阿等良驛), 기장역(機張驛)이 확인되고 있다.

고려 초 부산의 중심지는 동래현으로, 동평현과 기장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동래현의 대표적인 토착 세력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꼽을 수 있다. 1대 정지원(鄭之遠)과 2대 정문도(鄭文道)동래현 지역의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3대부터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동래는 고려 중기 약 110년 동안 울주의 속현이었으나 후기에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으로 승격하였다. 동래현의 지위가 올라간 데는 중앙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동래 정씨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래현과 달리 기장현은 1250년(고종 37) 무렵 주현이 되었고, 동평현은 고려 말까지 양주의 속현으로 머물렀다. 부산의 중심지인 동래는 한때 속현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는 양주나 울주에 비해 행정적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그 아래 부곡제 지역은 행정력이 더욱 더 미약했을 것이다. 속현은 12세기 이후 각지에서 백성들의 항쟁이 일어나면서 점차 주현으로 승격하였고, 부곡제 지역들도 차츰 소멸해 갔다.

[교통]
동래현, 동평현, 기장현이 속현일 때는 행정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지방관이 있는 주현과 정기적으로 왕래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행정상의 교류는 22역도(驛道) 중 하나인 금주도(金州道)의 역로망(驛路網)과 역전(驛傳) 업무를 담당하는 역참 시설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계수관 지역인 동경[현 경주]에서 울주 치소(治所)로 하달된 행정 업무는 다시 울주의 굴화역(屈火驛)-간곡역(肝谷驛) 그리고 아등량역[기장현]-소산역[동래현]을 경유하여 동래현동평현 치소에 각각 도착하였다.

각 고을에서 거둬들인 조세와 공물이 도읍지로 옮겨지는 경로를 살펴 경제적 교류 양상을 유추할 수 있다. 부산에서 도읍지 개경까지는 우선 거리가 멀고 육로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이나 현물은 바닷길을 통해 운반되었다. 세곡을 실은 조운선(漕運船)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연안 항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를 통해 경창(京倉)에 이르렀을 것이다.

부산을 비롯한 인근의 양산·울산의 세곡 및 공물은 합포현(合浦縣)[현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石頭倉)에서 1차로 취합,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5월까지 경창으로의 운반을 완료하였다. 한편 13~14세기 연근해에 자주 출몰하였던 왜구는 동래현 등의 치소를 털고, 동시에 석두창으로 향하는 각 군현의 조운선을 해상에서 약탈하거나 나포해 갔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대규모 물자 수송이 해운(海運)을 통해 빈번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토착 세력]
동래 지역의 토착 세력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래현 조에는 “본현의 토성이 5이니, 정(鄭), 송(宋), 옥(玉), 정(丁), 조(趙)요, 내성이 3이니, 왕(王), 박(朴), 이(李)이며 속성이 1이니 김(金)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동래 지역의 세력가는 토성으로 일컬어지는 다섯 성씨이며, 그중 최고의 실권자는 맨 앞에 나오는 동래 정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래 정씨는 대대로 향리의 최고위직인 호장을 맡아 행정 실무를 지휘하였다. 이는 1928년 경기도 장단군에서 발견된 정목(鄭穆)의 묘지명 가운데 “할아버지의 휘는 지원(之遠)으로, 군장(郡長)이며 부친의 휘는 문도(文道)로 군장이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동래 정씨가 동래 지역의 대표 성씨로 떠오르고, 역사에 부각된 것은 정목 때부터이다. 정목은 18세에 상경하여 27세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33세 때인 1072년(문종 26) 과거 급제 후 중앙 관리가 되어 3품 관직에까지 오른 뒤 66세에 사망하였다. 4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을 제외한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이 현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래 정씨정목의 아들 정항(鄭沆)[1080~1136]과 손자 정서(鄭叙) 대에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정항숙종(肅宗) 때 급제하여 상주 사록에 임명되었으며, 만기를 채우고 내직으로 들어가 한림원 직에 올랐다. 예종(睿宗) 조에 내시로서 주사를 관장하다가 이자겸(李資謙)을 따라 송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우정언에 올랐다. 인종(仁宗) 대에 이자겸이 숙청된 뒤 차츰 요직에 올라간 것으로 미루어 이자겸의 반대 세력이었던 것 같다. 정항은 문벌 귀족과 대립적인 위치인, 과거를 통해 출세한 신진 관료였다. 『고려사』 열전 정항전(鄭沆傳)의 “죽었을 때 상례를 치를 것이 없을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다”는 기록에서도 정항이 기득권 세력의 대표인 이자겸과 거리를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으로 아들 정서 대에 이르러 임금의 인척으로서 정치적 활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정항은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 때 묘청의 반대 세력인 개경파와 행동을 같이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굳이 정항이 개경파 편을 든 이유를 찾자면 유학을 공부한 신진 지식인으로서 묘청파의 전통 사상과 거리가 있었다는 점, 본향인 동래가 경주와 가까워 서경을 축으로 하는 지역들과 대립할 소지가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정항의 아들 정서는 생몰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예종, 인종, 의종(毅宗), 명종(明宗) 등 4대에 걸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찍이 이자겸의 권세에 맞서고, 묘청의 난 때는 개경파로서 임금의 편을 든 아버지 덕분에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하여 벼슬이 정5품인 내시낭중에 이르렀다. 부인의 언니가 인종의 비 공예 태후(恭睿太后)여서 임금과는 동서 간이니 처가의 배경도 대단하였다. 또한 임금도 각별히 정서를 총애하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정서에 대해 “성격이 경박하나 재주가 있다”고 적고 있다. 인종의 뒤를 이어 의종이 즉위한 후 왕의 동생인 대녕후 왕경(王暻)을 추대하려는 무리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1151년(의종 5)에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정서는 동래로 귀양을 가서 현의 남쪽 4㎞[10리]쯤 되는 거리에서 오이를 재배하며 살았다. 스스로 과정(瓜亭)이라는 호를 짓고, 왕이 다시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노래한 것이 고려 가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이다. 정서는 무신란 직후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이후 정씨 가문에서 요직을 차지했다는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씨는 고려 말기에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양생(鄭良生)이다. 정양생공민왕(恭愍王) 때 판관을 역임하였으며, 공민왕이 후사를 얻기 위해 왕비를 고를 때 딸이 간택되어 내정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대외 관계]
고려 말에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연근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피해를 입혔다. 『고려사』 권133, 열전 46, 1376년(우왕 2) 12월의 기록에 따르면 왜구가 동래, 동평, 기장 일대를 침략해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며 가옥을 불살랐다고 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적을 때는 배 20여 척, 많을 때는 400여 척에 3,000명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백성들이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리자 조정에서는 왜구의 토벌 및 방어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먼저 군사 체계를 강화하였는데, 수군의 창설도 그러한 노력 중 하나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따르면 기장에는 두모포영(豆毛浦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고려 말로 생각된다. 또한 왜구를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의 성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1391년(공양왕 3) 기장군에 성을 쌓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동래읍성 중수에 대해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성곽 조 이첨(李詹)의 읍성기는 “원수 박위(朴葳)는 일찍이 김해 부사로 있을 때 망산성(望山城)을 쌓았다. 성을 지킬 준비를 한 다음 첩문을 발송하여 장정(壯丁)을 소집, 성을 쌓는 것을 살펴 1387년(우왕 13) 8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달을 넘겨 완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동래읍성은 왜구를 막기 위해 전국에 수축령이 내려진 가운데 박위의 감독으로 성을 대대적으로 고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의 성곽은 왜구 방어책의 일환으로 기장읍성과 동래읍성이 축조 또는 개축되었던 것이다.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는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최영(崔瑩)을 모시는 무민사(武愍祠)가 있다. 무민사 외에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자성대(子城臺)수영 사적 공원에 있는 최영의 사당은 고려 말 부산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문화]
고려 시대 부산의 문화는 불교의 흐름과 함께 설명할 수 있다. 통일 신라 하대 이후 새로운 사조인 선(禪) 사상의 전래로 야기된 불교계의 파장은 대단히 컸다. 이에 따라 선 사상을 수용한 대호족(大豪族), 기존의 교학 불교를 유지하려는 신라계의 귀족, 독자적인 신앙과 조직을 표방하여 기층민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려는 군소 호족이 공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중앙 집권적 귀족 사회를 지향하였던 고려 왕조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정치사상으로서는 유학(儒學)이라는 외피를 통해서, 사회 전반을 주도하는 구도로서는 교종 불교를 중심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문벌 체제가 강화되면서 여러 종파가 공존하여 균형을 이루던 불교계는 차츰 보수성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사원이나 종파를 둘러싼 사상이나 종교 외적인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고려 후기 불교사는 12세기와 원나라 간섭기로 나누어 수선사 및 백련사의 결사 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결사 운동의 변질로 나타난 불교의 사회적 기능 축소, 간화선(看話禪)[화두(話頭)를 사용하여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의 유행에 따른 사상적 비탄력성, 그리고 승려의 세속화와 자질 저하 등으로 불교는 지방의 향리층과 독서층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다. 부산 지역 사찰의 동향은 이 같은 불교계의 흐름 속에서 범어사만덕사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대에 창건되어 흥덕왕(興德王) 대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 시기 범어사는 화엄종 사찰로서 지방 사회에 큰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불교가 지방으로 전파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의상(義湘)의 화엄종은 평등 이념을 천명하고 탁발을 실천한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지금껏 소외되었던 지방 세력과 백성들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상의 불교 철학이 경주 외곽인 부산 지역까지 미쳐 범어사의 창건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지만, 고려 시대에도 유지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덕사범어사와 달리 선 사상의 흐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만덕사는 최근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범어사에 버금가는 중요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된 금당의 규모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신라 말, 고려 초 진해만 연안을 통해 들어와 창원, 진례, 김해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선문(禪門)과 관련지을 수 있다. 창원 봉림사지와 성주사가 당시 유입된 선 사상에 따라 건립된 선문이라는 점에서 만덕사지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산문(山門)[선문의 다른 이름]의 위력은 대단히 커서 성주사의 경우 불전 80칸, 행랑 800여 칸, 수각 7칸 등 무려 1,000여 칸에 이르는 거대한 사찰이었다. 또한 성주산문의 경우 낭혜(朗慧)의 이름 있는 제자가 2,000여 명이나 되었고 여암(麗巖)의 제자가 500명, 현휘(玄暉)의 제자가 300명이나 되었다. 봉림산문도 여기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컸다. 위세를 자랑하던 선문 가운데 하나인 봉림산문과 성주산문의 영향은 구포에서 동래로 넘어가는 만덕사에까지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만덕사가 있던 만덕동은 김해와 가까워 김해를 거점으로 한 호족 소율희(蘇律熙) 그리고 인근의 덕천동 등지에서 발굴되는 대량의 도자기 등을 볼 때 지방 토호 세력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고, 이것은 선종의 흥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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