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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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392
한자 金若水
영어음역 Gim Yaksu
이칭/별칭 김두전(金枓佺),김두희(金枓熙)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4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박철규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출생 시기/일시 1890년 10월 21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4년 - 관립경성공업전습소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5년 12월 - 세이소쿠영어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진링대학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0년 - 니혼대학 사회학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조선노동공제회 창설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1월 - 북성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4년 4월 - 조선노동총동맹 및 조선청년총동맹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제1차 조선 공산당 건설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2월 - 체포되어 4년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 출감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민중동맹 창설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2월 -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지명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조선공화당 창당
    활동 시기/일시 1948년 5월 30일 - 국회 의원으로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49년 6월 -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월북 후 인민경제대학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숙청되어 평안북도로 추방됨
    몰년 시기/일시 1964년 1월 10일연표보기 - 사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49년 6월연표보기 -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40
    학교|수학지 관립경성공업전습소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니혼대학 - 일본 도쿄
    활동지 기장광복회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해. 본명은 김두전(金枓栓)이며, 이명은 김두희(金枓熙). 아버지는 김은홍이다.

[활동 사항]
김약수(金若水)[1890~1964]는 1890년 10월 21일에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40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열단 김원봉(金元鳳) 단장이 물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약수(若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김약수는 휘문의숙을 거쳐 1914년 관립경성공업전습소 응용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다니다가 1915년 12월 중퇴하였다.

귀국 후 고향 기장에서 기장광복회 회장을 맡는 등 독립 운동에 투신하다가, 1918년 국외에서 독립 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김원봉·이여성(李如星) 등과 함께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재학 중 조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 활동을 위해 이여성과 함께 1920년 다시 귀국하였다. 1920년 9월 박중화(朴重華)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창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적을 두고 1921년 11월 무정부주의자 박열(朴烈) 등과 함께 북성회를 조직하였고, 조선고학생동우회 등에 관여하다가 1922년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사회주의 단체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내에 잠입한 정재달과 접촉하여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 및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1925년 제1차 조선 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926년 12월 대구에서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32년 10월까지 복역하였다.

김약수는 만주 사변 후 『대중』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으나 내용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일제 경찰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구금하고 탄압하는 바람에 폐간되었고,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 불응하여 여러 번 구금을 당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여 일제 강점기에 총 9년 7개월 동안이나 형무소에 갇혔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나, 건국준비위원회의 좌경화와 조선인민공화국으로의 개편에 반대하면서 좌익 진영을 이탈하여 한국민주당의 조직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1946년 10월 다시 한국민주당을 탈당하였고 김규식과 함께 민중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여 상임 위원을 맡으며 중간파 노선을 취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지명되어 활동하였고, 1947년 5월 민중동맹에서 탈퇴해 조선공화당을 창당하여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매진하였던 좌우 합작 운동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1947년 12월에 해체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단독 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김약수 역시 현실적인 노선으로 선회하여 단독 정부 수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8년 5·10 총선 때 동래[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제헌 의원에 당선,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소장파 의원의 지도적 구실을 하였으며 1949년 6월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6·25 전쟁 중 월북하여 1955년 북한의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입교하였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 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959년 숙청되어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었다. 1964년 1월 10일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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