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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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528
한자 李龍範
영어음역 Yi Youngbeom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대래

    [상세정보]

    성격 기업인|정치인
    성별
    대표경력 대동공업주식회사 사장
    출생 시기/일시 1905년 10월 30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일본 규슈 탄광에 노동자로 들어감
    활동 시기/일시 1945년 이후 - 대동공업회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4년 5월 20일 - 제3대 국회 의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58년 5월 2일 - 제4대 국회 의원에 당선,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에 임명
    출생지 경상남도 창원군 동면 석산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마산시 오동동
    활동지 대동공업주식회사 - 경상남도 마산시 신포동 2가 76
    활동지 대동공업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창선동 2가 25
    활동지 자유당 경남도당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이자 정치인.

[활동 사항]
이용범(李龍範)은 1905년 10월 30일 경상남도 창원군 동면 석산리의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지 1년이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이후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으로 이주하여 19세 되던 해인 1923년 일본 규슈[九州]로 건너가 20년 동안 탄광의 인부로 생활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강원도에서 기반을 잡고 지하자원 개발에 종사하여 10여 년 만에 40개소의 광산을 획득하였다.

해방이 되자 이용범은 500만 원의 자금으로 대동공업회사를 설립하여 토건과 하역, 철공, 제재 등의 사업을 하였다. 이용범이 거부가 된 것은 미군의 공사를 독점하면서이다. 미군 진주 이후 주둔지의 막사를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용범은 미군의 신임을 얻었는데, 대동공업주식회사 출장소를 부산에 두고 부산 시내나 근교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의 건설을 도맡다시피 하여 큰돈을 벌었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토건업자들이 장비를 모두 버리고 후퇴했을 때 이용범은 오히려 장비를 사 모았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시작되자 이용범은 전국의 재해 복구 시설의 절반을 도맡아하였다. 당시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李起鵬)과 절친한 사이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자유당 정치 자금으로 내놓으면서 토건업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공사나 이권 개입에 빠지는 경우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부가 된 이용범은 재력을 기반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1954년 제3대 및 1958년 제4대 국회 의원에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으며,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경상남도 일대는 물론 전국의 세도가로 행세하며 부정부패와 부정 선거를 자행하던 이용범의 권력도 1960년 4·19 혁명으로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창원의 대산고등학교, 창원중학교, 창덕중학교, 진전중학교 등을 세웠으며, 대동육영회 이사장, 창원학원 이사장, 부산동주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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