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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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571
한자 羅蕙錫
영어음역 Na Hyeseok
이칭/별칭 정월(晶月)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준

    [상세정보]

    성격 화가
    성별
    본관 나주
    출생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단편 소설 「경희」·「정순」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미술 교사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영생중학교 교사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3.1운동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김우영과 결혼
    활동 시기/일시 1921년 3월 - 유화 개인 전람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9월 - 중국 둥베이 안둥 현으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22년~1932년 - 9차례 조선 미술 전람회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제4회 조선 미술 전람회 3등 입상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제5회 조선 미술 전람회 특선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유럽 여행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대표작 「나부」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제10회 조선 미술 전람회 특선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일본 제국 미술 전람회 입선
    1932년 - 이혼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대표작 「선죽교」 발표
    1934년 - 『삼천리』에 「이혼고백서」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5년 10월 - 진고개 조선관에서 소품전 개최
    몰년 시기/일시 1948년 12월 10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0년 - 문화관광부 문화 인물로 지정
    추모 시기/일시 2009년 - ‘생애와 그림전’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9년 - 기념 학술 강연회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9년 - 『나혜석 전집』 출간
    추모 시기/일시 2009년 - 추모 백일장 개최
    출생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거주|이주지 중국 둥베이 안둥 현
    학교|수학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 일본 도쿄
    활동지 정신여자중·고등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영생중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서울특별시
[정의]
부산 출신의 행정가 김우영(金宇英)과 결혼한 근대 여류 미술인.

[개설]
본관은 나주. 호는 정월(晶月). 아버지는 나기정(羅基貞)이다.

[활동 사항]
나혜석(羅蕙錫)[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은 대한제국에서 경기관찰부 주사를 지냈고, 시흥 군수로 재직하다가 국권 강탈을 맞았으며, 합병 후 시흥 군수에 유임되었다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용인 군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문에 나혜석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둘째 오빠 나경석(羅景錫)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화가로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빠 나경석은 자신의 친구 최승구(崔承九)를 나혜석에게 소개하였다. 이미 본국에 조혼(早婚)한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나혜석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1916년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나혜석의 인생관이 크게 바뀌어 모든 희망을 예술에 걸게 되었다.

1918년 귀국한 나혜석은 정신여자중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영생중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는 한편, 단편 소설 「경희」·「정순」 등을 발표하여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냈다. 이듬해에 3·1 운동이 발발하자 나혜석은 3월 25일에 있었던 이화학당 학생들의 만세 사건에 관여함으로써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혜석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1920년 4월 나혜석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본 쿄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김우영의 6년 구애를 받아들여 서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나혜석김우영의 본가가 있던 부산 동래에 잠시 머물렀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혼한 이듬해에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남편인 김우영을 따라 중국 둥베이[東北]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1921년 3월 나혜석은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였는데, 전람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1925년과 1926년에는 연이어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3등과 특선에 입상하였다. 1928년에는 대표작 「나부」를 발표하였다. 한편 1921년 9월에 김우영이 일본의 관리가 되어 중국 둥베이의 안둥 현[安東縣]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하면서 나혜석도 함께 갔다. 이후 927년 시작된 2년간의 유럽 여행에서 천도교 신파의 수장이자 김우영의 절친이었던 최린(崔麟)과의 불륜으로 결혼 생활은 파경을 맞이하였다.

1932년 김우영에게 이혼당한 나혜석은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하게 되고, 그 결과 1931년 제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 제국 미술원 전람회에서도 입선하였으며, 1933년에는 대표작 「선죽교」를 발표하여 다시 재기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1934년 『삼천리』 8-9월호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면서 나혜석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더욱 냉담해졌다. 1935년 10월 서울 진고개[현 충무로]의 조선관에서 개최된 소품전이 실패하고, 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죽자 나혜석은 불교에 심취하여 수덕사 아래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나, 1948년 12월 10일 52세의 나이로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대표 작품으로 「정순」[『여자계』1호, 1918]·「가연」[『신가정』, 1922]·「인형의 가」[『매일 신보』, 1921]·「파리의 그 여자」[『삼천리』, 1935]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2000년에 문화관광부 문화 인물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에 ‘생애와 그림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되었다. 또 같은 해인 2009년에 기념 학술 강연회가 경기도 문예 회관에서 열렸으며, 『나혜석 전집』도 출간되고, 추모 백일장도 수원 나혜석 거리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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