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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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582
한자 具榮佖
영어음역 Gu Yeongpil
이칭/별칭 최계화(崔桂華)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청광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경숙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 위원
    출생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7년 - 경성공업전습소 수료
    수학 시기/일시 1910년 -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독립운동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귀국 후 일합사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일본 경찰에게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17년 5월 18일 -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17년 12월 - 대구은행 1만 900원 탈취 시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길림성에서 독립운동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의열단 가입 및 밀양 폭탄 사건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부산 전보 사건 감행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2월 2일 -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흑룡강성 영고탑에서 한교회·간민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대동학원 경영
    몰년 시기/일시 1926년 9월 11일연표보기 - 사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3년 - 일합사 조직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0년 3월 12월연표보기 - 밀양 폭탄 사건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부산 전보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청광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
    학교|수학지 경성공업전습소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
    활동지 중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활동지 삼광상회 - 중국 길림성
    활동지 원보상회 - 중국 요령성 안동현
    활동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 중국 상하이
    활동지 경상남도 밀양시
    활동지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활동지 한교호회 - 중국 흑룡강성 영고탑
    활동지 간민호회 - 중국 흑룡강성 영고탑
    활동지 대동학원 - 중국 흑룡강성 영고탑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변절자.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활동 사항]
구영필(具榮佖)[1890~1926]은 1890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청광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밀양으로 이사 가서 성장하였다. 15세까지 한문을 배웠고 17세에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이후 3년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에서 공부하다가, 국권 강탈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3년까지 중국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서 3년간 머무르면서 독립지사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3년 귀국하여 항일 비밀 단체인 일합사(一合社)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1916년 봉천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7년 5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7년 12월에 이종암(李鍾巖)이 근무하던 대구은행의 금고 돈 1만 900원을 가지고 김대지(金大池) 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려다 어렵게 되자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길림성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1918년에 다시 봉천성에 삼광상회, 안동현에 원보상회를 개설하고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확보하여 제공하였으며 연락처 역할을 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재무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3월경 의열단에 가입하여 국내에 잠입해서 동지들과 밀양 폭탄 사건을 일으켰다. 체포망을 피해 부산 영주동에 있는 친척 김용술[삼광상회 점원, 대한독립군정서 남서정찰부장]의 집으로 피신하여 독립 활동을 벌였다. 이때 부산 전보 사건이 일어났다.

부산 전보 사건은 구영필이 김용술·김재현과 조선의 독립 운동을 선동하고 민심을 소란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한독립군정서의 박용만이 서명한 「경고어내재동포(警告於內在同胞)」라는 경고서와 독립운동 전보를 인쇄하여 배포한 일이다. 경고서와 전보를 각각 100부씩 인쇄하여 부산의 송태관·오인규(吳仁奎), 밀양의 손영은·진성일·진교옥, 대구의 서병주, 동래의 김명익, 부산공립상업학교 등 15곳에 우편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초량동영주동의 각 상점에 배포하였다. 1년 후 부산 전보 사건이 발각되어 김용술·김재현은 1921년 12월 2일 체포되었으나 구영필은 피신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구영필은 이 사건으로 출판법 위반으로 결석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구영필은 북만주 영고탑(寧古塔)에 정착하였고 호적 이름을 최계화(崔桂華)로 변경하였다. 1922년 영고탑에서 한교회와 간민회 등을 설립하였고 김사국(金思國)과 같이 무산자 교육 기관인 대동학원(大同學院)이라는 중학교를 경영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사상 경향도 사회주의로 변하였다. 1926년 9월 11일 오전 7시에 영고탑 아문압 동채시(東菜市)에서 신민부 별동대원 황덕환(黃德煥)에게 피살되었다. 구영필이 피살된 원인은 친일 행위에 대한 김좌진(金佐鎭) 측의 처단이라고 알려졌다.

구영필을 변절자로 여긴 사람들은 이종암을 밀고한 일, 1922년 한인 사회를 건설하면서 일본영사관을 경유하여 이루어진 속미[좁쌀] 방매(放賣) 사건, 중국 관헌에게 신민부 부원을 밀고하여 체포되도록 한 사건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은 신민부[김좌진]와 간민회[구영필] 사이의 영안현 장악 과정에서 비롯된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구영필이 이 시기에 사회주의 노선으로 기울어지면서 갈등이 더 깊어진 결과이므로 친일 변절자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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