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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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596
한자 嚴進永
영어음역 Eom Jin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남위원회 부위원장
    출생 시기/일시 1899년 3월 30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수학 시기/일시 1922년 - 경성예술학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동래 장터 3·1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0일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무대예술연구회 창설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민족 해방 비밀 결사 사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복역
    활동 시기/일시 1928년 8월 12일 - 동래노동조합 집행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제국주의 반전사상 출판 사건으로 징역 1년 복역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선전 조직 책임자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20일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
    몰년 시기/일시 1947년 6월 26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연표보기 - 동래 장터 3·1 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배일 사건 및 일본인 경찰관 습격 상해 사건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민족 해방 비밀 결사 사건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제국주의 반전사상 출판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학교|수학지 동래고등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0지도보기
    활동지 동래 장터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활동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 부산광역시 동구
    활동지 독립촉성국민회 부산지부 - 부산광역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동래구 명륜동에서 의관직(議官職)에 있었던 엄석찬(嚴錫贊)이다. 동래 장터 3·1 운동에 참여한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학생 엄병영(嚴秉永)의 친형이다.

[활동 사항]
엄진영(嚴進永)[1899~1947]은 1899년 3월 30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을 무렵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다. 3월 7일에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가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 대표에게 전해 준 독립 선언서를 건네받으면서 엄진영은 동래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엄진영김귀룡(金貴龍)·고영건(高永建)·김인호(金仁浩)·이상덕(李相德)·박득룡(朴得龍)·윤삼동(尹三東) 등과 함께 구체적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이며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곽상훈은 수학 교사 이환(李環)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의 배후에서 참모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에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엄진영복천동에 있던 자신의 사랑방과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들은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독립 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태극기 등을 준비하였다. 인원을 두 무리로 나누어 제1대는 엄진영을 중심으로 동래군청 앞에서, 제2대는 김귀룡을 중심으로 남문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를 즈음하여 주도 학생들은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품고 속속 모여들었다. 이윽고 2시가 되자 엄진영은 동래군청 앞 망미루(望美樓)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학생들과 장꾼들이 호응하여 장터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발포하며 시위 군중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였고, 이때 엄진영도 체포되었다.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경성예술학원을 졸업하고, 무대예술연구회를 창설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항일 운동을 지속하였다. 1924년 배일 사건 및 일본인 경찰관 습격 상해 사건으로 벌금 20엔을 선고 받았는가 하면, 1927년 민족 해방 비밀 결사 사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았다. 1928년 8월 12일 지역 통합 노동조합으로 창립된 동래노동조합의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제국주의 반전사상 출판 사건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에서 선전 조직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1946년 2월 20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주로 우익 진영에서 활약하였다. 1947년 좌우익의 사상 대립으로 극도로 혼란한 국내 정국에 휘말려 6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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