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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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811
한자 金井山城東門
영어의미역 The East Gate at Geumjeongsa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41-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영택

    [상세정보]

    성격 문루|성문
    양식 홍예식|팔작지붕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2칸
    소유자 국유
    관리자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건립 시기/일시 1703년연표보기 - 금정산성 축조와 함께 설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07년연표보기 - 금정산성 동문 완성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4년연표보기 - 금정산성 동문 수리 축조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2년 -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현 소재지 금정산성 동문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41-2지도보기
    원소재지 금정산성 동문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41-2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동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

[위치]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금정산성 동쪽 고갯마루 해발 415m의 높은 곳에 위치한다.

[변천]
금정산성 동문은 1703년(숙종 29) 금정산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설치되었다. 1806년(순조 6)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래읍성의 배후 성지로서 금정산성의 경영을 요청하여, 1807년 가을에 금정산성 동문을 완성하였고, 1824년(순조 24)에 수리 축조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금정산성 동문이 허물어져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와 해체 보수가 이루어졌다.

[형태]
금정산성 동문 진입로의 입구는 경사져 있어 성문보다 낮은 편이어서 사람이 말을 타고 통과하기가 어렵다. 또 앞쪽에서 휘어져 들어오게 되는 지형지세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성문이 직접 눈에 띄지 않게 방어력을 높여 적의 공격을 곧바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규모는 육축 부분이 63.11㎡ 정도이고, 문루가 31.50㎡이며 폭은 610㎝이다. 성문의 폭은 300㎝, 홍예의 높이는 340㎝이다. 성문의 형식은 앞면과 뒷면 모두 홍예식(虹霓式)[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방식]으로 되어 있다.

성문 위에 성가퀴[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설치되어 있으나 총안(銃眼)[성가퀴 또는 포사(砲舍) 안에서 적을 내다보고 총을 쏠 수 있게 한 구멍]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의 어간을 좌우 협간보다 두 배 정도 넓게 잡았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로서 양성 바름[지붕마루의 수직면에 회사 반죽 또는 회반죽을 바른 것]으로 되어 있다. 고갯마루에 입지하므로 문의 좌·우측을 만곡(彎曲)되게 내어 쌓아 나팔 모양을 이루어 적대(敵臺)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현황]
현재 금정산성 동문은 완전히 복원되어 웅장한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동래 방면에서 금정산성으로 출입하는 성문으로서 관문의 역할을 겸하고 있으며,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금정산성 동문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금정산성 4성문 중의 하나로서 일제 강점기에 방치되어 훼손되었으나, 현재 복원되어 조선 시대 산성의 문루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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