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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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1889
한자 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Honoring the Achievement of Garakguk Taejo Wang Yeonghu
이칭/별칭 가락국허황후비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산49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성격 비|유허비
    양식 갓머리 비석
    관련인물 성순영|안병목|김재익
    재질 화강암
    소유자 흥국사
    관리자 흥국사
    건립 시기/일시 1956년 2월연표보기 -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 건립
    관련인물 생년시기/일시 서기 33년연표보기 - 허 황후 출생
    관련인물 몰년시기/일시 147년연표보기 - 허황후 사망
    현 소재지 유허비 위치 -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산498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에 있는 수로왕(首露王)허황후를 맞이한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개설]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는 1956년 명월사 터에 가락국의 고찰 흥국사를 중건하면서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맞이한 유서 깊은 곳임을 알리기 위하여 세웠다.

[건립 경위]
몇 백 년 동안 김해 김씨(金海金氏) 종중에서 흥국사 복원에 대하여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실천한 사례가 없었다. 1956년 흥국사가 중건되면서 김해 김씨 녹산종친회에서 발기하여 비를 세웠다. 하산(夏山) 성순영(成純永)이 글을 짓고, 광주(廣州) 안병목(安秉穆)이 글씨를 쓰며, 김해 김씨 종친회 숭선전(崇善殿) 참봉 김재익(金載翼)이 시주를 맡아서 건립하였다.

[위치]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산498번지 흥국사 경내에 있다.

[형태]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갓머리 모양이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로 김해 고을에서 40리 바닷가에 산이 있는데, 명월산이라 한다. 서로 전하길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이 산에서 처음 허 왕비를 만났으며, 그 높은 언덕 아래 머무른 터가 있다고 한다. 처음 가락국 수로왕이 현세에 태어난 것은 신과 다르다 하여 9간[당시 부족장]이 받들어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왕위에 오른 지 7년 만인 무신년[서기 48]에 9간 등 여러 신하들이 “처녀를 간택하여 왕후를 삼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아아, 내가 어찌 배필이 없으리오? 마땅히 하늘이 내리실 것이니 오직 그때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9간의 한 사람인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더니, 어떤 배가 서남쪽으로부터 와서 멈추었는데, 곧 아유타국의 공주가 타고 있었다.

달려가서 왕께 아뢰니 왕이 의장을 갖추고 나아가서 장막으로 친 임시 궁전을 설치하여 예를 갖춰 맞이하고, 수레를 타고 같이 궁전으로 돌아오니 이분이 허황후로 이름은 황옥이며 당시 나이는 16세였다. 스스로 말하길 ‘아버지 왕의 꿈에 옥황상제가 명령하길 가락국 왕이 배필이 없으니 네가 딸을 보내어 배필이 되게 하여라 하여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감탄하여 산 이름을 지금의 이름인 명월산으로 하고 그 터에 절을 세워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중간에 여러 차례 폐허가 되고 또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다시 허물어져 무성한 풀밭이 된 지 수백 년이 되었다. 후손 두서너 사람이 뜻을 두고 힘을 다하여 다시 유적을 세워 이미 낙성을 마쳤다. 나에게 허감, 김종익, 김기환 세 사람이 와서 비석 새길 글을 부탁하니 생각건대 우리 동방 조선 사람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글을 늦게 하여 왕조 세대에 빠진 글이 많았다.

이를 중국 역사에 비하면 중국인은 복희씨와 신농씨[중국 전설 시대의 인물로 복희씨는 팔괘를 긋고, 신농씨는 농사짓는 법과 의약을 만든 신인이라 함] 같은 것이다. 아득한 원시 시대의 그 처음 인물을 정기가 변화하였다거나 신이 감발하였다고 표현하여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듯하여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상고할 수 없어도 더구나 공사의 문적에 올려져[『사략』에 천황씨로부터 이야기됨] 칭송하는 말로 노래를 지어 아득한 백대에까지 빛나고 빛나게 없어지지 않는 것인가? 내가 수로왕과 왕후에 대해서는 진실로 의논할 수 없으니 어찌 대요를 쓰겠는가?

명(銘)을 이어 가로되 ‘남국의 터가 된 이 산하, 그 옛날 아득한 시절에/ 자색의 끈에 달린 황금 상자로 신군(神君)께서 이렇게 오셨네/ 서방에서 온 공주는 하늘이 맺어 준 배필이라네/ 상서로운 바람이 배를 보냈으니 붉은빛 깃대 꽂고 석탑을 싣고 왔네/ 떼 지어 둘러싸고 높은 산 오르는 건 총애와 사랑받는 신하들이라네/ 왕께서 친영(親迎)하시면서 예의가 차례차례 진행되었네/ 높은 고개 아래로 봉우리 둘러싸고 숲이 빼곡하다네/ 꾸불꾸불한 산언덕에 장막을 치니 궁전이 되었네/ 열 명의 아들을 낳으시어 나라가 오백 년을 누렸다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지만 두 사람은 어머니 성씨를 따랐다네/ 그리하여 김씨와 허씨는 수를 헤아릴 수 없다네/ 그 능침이 길이 보존되어 와 다시금 이 일도 할 수 있다네/ 우뚝 높은 풍만한 옥돌은 나그네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하네/ 주포(主浦)에 구름 걷히고 능현(綾峴)에는 달빛도 밝다네/ 닻줄을 매고 바지도 벗었던 일, 그 모습 완연히 어제의 일인 듯/ 말과 같은 바람과 수레 같은 구름은 푸른 하늘에 가득하네/ 천년 만년토록 오랜 세월 길이 사라지지 않으리.’

단기 4289년 병신년[1956] 2월 일 하산 성순영 삼가 짓고, 광주 안병목 삼가 쓰다. 시주 숭선전 참봉 김재익, 발기 녹산종친회[直金海府四十里 濱海而有山曰 明月相傳駕洛始祖王 初遇許后於玆山 其高嶠下 盖有墟云 始駕洛王 現生神異 爲九干所奉戴建國卽祚之七年戊申 群臣諫揀女爲后 王曰 吁余豈無偶 當錫自天 其惟侯哉 一日命留 天干 侯干望山島 有船自西南來泊 阿踰陀國公主 載焉 奔告于王 王備儀仗出 設幔殿禮迎 輦而還宮 是爲許后名皇玉 時年十六 自言父王夢 上帝命曰 駕洛元君 未有伉儷 爾其遺爾女 作配 是以至此 王感歎 名山以今名 創建佛寺于 其址 以識之中間屢廢累興 後更鞠爲茂草者 數百載 後孫之數三有志 竭力重建 己告成矣 今玆諸後孫 又將竪碑以彰其跡 盖千數百年所擬議未遑之擧也 許堪. 金鍾益. 金基煥三君 來屬矛鑴刻之文 余惟我東人文晏闕 在王之世 比之中國 則殆若羲農之邃古 原始闕初 氣化神發 事或近於孟浪 而實則有不可認爲無稽 而況公私載籍誦設歌謠 章章然曠百世而未泯者乎 余於王與后之事 信無議焉 乃 撮 其大要而書之 系以銘曰 ‘南紀山河 伊昔鴻雁, 紫纓金盒 神君是降. 西土王女 天作之合, 祥颷送帆 茜旗石塔, 簇擁登屼 臣凌嬖子, 王親迎之 禮儀秩序, 高嶠之下 峰回林密, 絝宛□亶岡阜 □殿攸設, 誕生十男 享國五百, 同根之出 二從母族, 曰金曰許 其麗不億, 陵寢長存 復克是役, 有屹豊珉 躕躇行客, 主浦雲捲 綾峴月白, 繫纜解袴 宛其如胙, 風馬雲車 洋洋碧落, 於萬斯年 永示不泐’ 檀紀四千二百八十九年丙申歲仲秋節 夏山 成純永 謹撰 駕洛國紀元一千九百十五年丙申 二月 日 廣州 安秉穆 謹書 施主 崇善殿參奉 金載翼 發起 菉山宗親會].”

[현황]
명월사 사적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흥국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지금의 흥국사는 가락 고찰과 거리가 먼 종파에서 운영하고 있어 가야사가 제대로 홍보되지 않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는 기록이 부족한 가야사 현장을 유물로 복원하여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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