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정발 전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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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2100
한자 忠壯公鄭撥戰亡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General Jeong Bal
이칭/별칭 정발 전망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정공단 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원영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61년연표보기 - 충장공 정발 전망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53년연표보기 - 정발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정발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2015년 10월 7일연표보기 - 충장공 정발 전망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4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충장공 정발 전망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현 소재지 정공단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지도보기
    원소재지 정공단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지도보기
    성격 비|전망비
    관련인물 정발(鄭撥)[?~1592]|박재하(朴載河)
    재질
    크기 전체 : 높이 309㎝, 대좌 가로 140㎝ × 세로 88.5㎝, 비신 : 높이 219㎝, 너비 75~76㎝, 두께 29.5~30㎝, 이수 : 높이 80㎝, 너비 120㎝, 두께 62㎝
    관리자 부산광역시 동구청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공단 내에 있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부산진 첨절제사 충장공 정발(鄭撥)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충장공 정발 전망비(忠壯公 鄭撥 戰亡碑)는 1761년(영조 37) 경상좌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정발(1553∼1592)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가대(永嘉臺)에 세운 것인데, 일제강점기 전차선로 개설에 따라 영가대가 헐리면서 현재의 정공단(鄭公壇)으로 이전해 온 것이다.

[위치]
충장공 정발 전망비는 동구 좌천동 증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정공단 내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는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좌천동 473]이다.

[형태]
충장공 정발 전망비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대좌는 가로 149㎝, 세로 88.5㎝이며 땅 속에 묻혀 있어 현재 확인되는 대좌 높이는 10㎝이다. 비신은 높이 219㎝, 너비 75∼76㎝, 두께 29.5∼30㎝이고, 이수는 높이 80㎝, 너비 120㎝, 두께 62㎝이다.

[금석문]
충장공 정발 전망비의 앞면에는 ‘충장공정발전망비(忠壯公鄭撥戰亡碑)’라는 비제(碑題)가 횡으로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정발 장군의 행적과 비를 세운 내력이, 비의 좌측면에는 이 비석의 건립일, 우측면에는 박재하의 명(銘)이 새겨져 있다.

“지난 임진년의 왜란 때에 부산의 첨사 정발공(鄭撥公)은 사기를 돋우며 성을 돌아다니면서 왜적을 무수히 쏘아 맞추어 하루 만에 적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곳이 세 곳이나 되었다. 화살이 떨어지자 부하 장수들이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간청하였다. 공은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또다시 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흐느끼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공이 탄환에 맞아 절명하니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공의 막료인 부사맹(副司猛, 종 8품) 이정헌(李庭憲)공도 곁을 떠나지 않고서 죽었고, 공의 애첩인 애향(愛香)도 공의 죽음을 듣고 달려와 곡하고 시신 곁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공의 노복인 용월(龍月)도 또한 적에게 달려들다 죽었다. 그 후에 왜장은 ‘귀국의 장수 중에 부산의 흑의장군(黑衣將軍)이 가장 두려웠다.’고 하였다. 이는 공이 싸울 때에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난이 평정된 뒤에 조정에서는 공에게 좌찬성의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 하였으며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과 함께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 동래성 남문에 비석이 있어 공이 순절할 때의 일을 상세히 적어 놓았으니 공을 찬양하는 일은 이것으로 거의 남김없이 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산진성은 공이 목숨을 바친 곳인데도 돌에 새긴 기록이 한 점도 없었다. 임진왜란 후 170년 만에 박재하(朴載河)가 왕명을 받들어 경상좌도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 머물게 되었다. 한 번 부산진성에 올라 공의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개연히 탄식하며 “이 곳에 어찌 충장공의 전망비가 없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돌을 캐어 영가대(永嘉臺) 옆에 세우고 사적을 비석 뒤에 새긴다. 아! 부산진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요새이고 섬의 오랑캐 배가 오가는 첫 지점이다. 공의 이름을 새기고 공의 사적을 기록하여 이곳에 세우는 것은 변방의 민심을 격동하게 하고 적의 간담이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 자[尺]의 곧은 비석이 견고한 성곽과 물샐 틈 없는 방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만력(萬曆) 임진(壬辰)년 170년 뒤 신사(辛巳)년(1761, 영조37) 여름에 절충장군(정3품 당상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재하는 명(銘)을 지어 말한다. 산악이 우뚝 솟은 것 높다할 것 없고, 해와 달이 빛나는 것 밝다할 것 없네. 오직 공의 절개만이 세상의 기둥이 되니, 고립된 성의 일편단심 만고의 모범일세. 노복과 첩의 충직함도 한 집안에 우뚝하고, 막료인 이공(李公)도 당(唐)나라 남팔(南八)처럼 늠름하였으니 짧은 비석에 적기 어려워도 깊은 바다처럼 다하지 않으리. 통훈대부 전행시강원사서 춘추관기서관 황간이 쓰다. 신사년 7월 일 세움.”

[粤在壬辰之亂 釜山僉使鄭公撥 勵氣巡城 射殪賊無數 一日之內 賊屍之山積者 凡三處矣 乃矢盡 偏裨請跳出 待援兵 公曰 吾當爲此城之鬼 敢復言棄城者斬 士卒皆泣 莫敢離次 俄而公中丸絶 城遂陷 公之幕賓 副司猛李公庭憲 不去而亦死之 公之妾愛香 聞公死 奔哭自剄於屍旁 公之奴龍月 亦赴賊死 其後倭將言 貴國之將 惟釜山黑衣將軍 最可畏也 盖公臨戰時 穿黑衣故也 亂定後 朝家贈公左贊成 諡曰忠壯 又與東萊府使宋忠烈公象賢 並享於忠烈祠 又有碑於東萊南門 詳載公殉節時事 凡所以表揚公者 殆可謂靡有遺矣 然釜城卽 公死綬之地 而獨無片石之記焉 後壬辰百七十年 載河受命 按嶺左水軍 駐節於萊上 一登釜山而 挹公之遺躅 遂慨然歎曰 此地安可無忠壯公戰亡碑也 於是伐石而竪之永嘉臺傍 記蹟於碑陰 噫 釜鎭乃我國南徼之咽喉 蠻船往來之初程也 刻公之名而 記公之事 立之於此地者 將欲以激邊心而 破賊膽也 三尺貞珉 未必無助於金湯之固 衣袽之備云爾 皇明萬曆 壬辰後一百七十年 辛巳之夏 折衝將軍 慶尙左道水軍節度使 朴載河 撰銘曰 山嶽之崒 不足爲高 日月之光 不足爲昭 惟公之節 撑柱宇宙 孤城一片 綱常萬古 僕妾之烈 並崒一室 矧又賓幕 凜乎南八 短碑難摸 溟海不竭 通訓大夫 前行侍講院司書 春秋舘記事官 黃幹書 辛巳 七月 日立]

[현황]
충장공 정발 전망비는 2015년 10월 7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현재는 부산광역시에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이 비석이 있는 정공단은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장공 정발 전망비는 영조시대를 대표하는 비석일 뿐 아니라 규모도 비교적 큰 편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특히 구름 사이로 두 마리 용이 마치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역동적인 표현의 이수는 조각기법이 뛰어나 조각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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