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은

대표시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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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2475
한자 尹相殷
영어음역 Yun Sangeun
이칭/별칭 청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655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차철욱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
    성별
    본관 파평(坡平)
    대표경력 구포은행 전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8월 10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4년 - 한학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01년 - 개성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0년 - 일본 게이오대학 청강생유학
    활동 시기/일시 1901년 1월 - 구포저축주식회사 두취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동래감리서 주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구포구명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월 15일 - 구포저축주식회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월 - 구포저축주식회사 취체역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2년 9월 - 구포은행 설립, 감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6년 1월 - 경남은행 전무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월 - 경남은행 취체역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3년 7월 - 경남은행 취체역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구포면 협의회원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구포시장확장기성회 위원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동래군학교비평의회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구포청년단 고문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구포면민대운동회 회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16일 - 경상남도 재무부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2월 20일 - 전매국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0년 6월 - 신탁은행 감사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84년 9월 25일연표보기 -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6월 28일 - 『부산의 근대 자본가 청운 윤상은의 일생』 출판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7월 3일 - ‘부산의 근대 자본가, 청운 윤상은의 일생’ 부산근대역사관 특별 기획전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655
    학교|수학지 개성학교 - 부산광역시[부산부 영주정]
    활동지 동래감리서 - 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 226번길 15호
    활동지 구포구명학교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2동 725지도보기
    활동지 구포저축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 시장 내
    활동지 경남은행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604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남도 도청 -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2-1
    묘소 부산시광역시 북구 구포동 산18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최초의 민족 은행인 구포은행[경남은행]을 설립한 경제인.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청운. 개항기인 1887년 8월 10일 동래 부사와 사천 군수를 지낸 윤홍석(尹弘錫)[1843~1902]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는 위로 윤필은, 윤명은과 아래로 윤영은이 있었다. 윤필은은 동래 부사, 윤명은은 고성 군수와 울산 군수를 지냈다. 동생 윤영은은 1908년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며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와 친하게 지냈다. 이들은 훗날 윤상은(尹相殷)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윤상은은 1901년 15세 때 아버지의 친구였던 박기종(朴琪淙)의 넷째 딸 박영자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윤인구, 큰딸 윤연숙, 둘째 딸 윤연학, 둘째 아들 윤현표, 셋째 딸 윤학자, 셋째 아들 윤현성이다. 박기종은 개항 후 부산에 근대 문화를 도입한 인물로, 특히 기선 회사와 철도 회사를 건설하였다.

[활동 사항]
1. 근대학교 설립

윤상은은 1894년 무렵 집에 독서재를 차리고 한학을 배웠다. 1901년 장인 박기종이 세운 개성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4년 박기종의 추천으로 동래감리서 주사가 되었다. 감리서는 부산의 일본인 전관 거류지를 상대하는 조선의 외교 기관으로 오늘날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봉래초등학교에 자리하였다. 윤상은은 회계와 통역을 주로 담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감리서가 폐지되면서 윤상은은 구포로 돌아와 낙동강변을 개간하면서 부업으로 양잠업에 종사하였다. 1906년 부산의 일본인들과 조선인이 공동으로 개최한 일한 상품 박람회에 양잠을 출품해 은상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선각자들은 애국 계몽 운동의 하나로 근대 학교를 설립하였다. 윤상은은 물상객주 장우석(張禹錫)의 도움으로 1907년 구포구명학교를 개교하였는데,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가 일시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윤상은의 조카이면서 1919년 3·1 운동 후 상해 임시 정부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尹顯振)이 제1회 졸업생이었다.

2. 구포은행 설립

윤상은은 개항기 조선인 자본가들의 상업 자본을 지원하기 위해 1909년 1월 15일 대부를 목적으로 하는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여기에는 장우석을 비롯한 구포 지역 유지들의 도움이 컸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후 새로운 회사령과 은행령에 따라 은행업으로 전환해야 하자, 1912년 9월 자본금 50만 원의 구포은행을 설립하였다. 이때 이규직(李圭直)을 비롯한 부산의 대주주들이 참가하면서 은행 경영권을 일시 잃었다.

1915년 구포은행은 경남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점을 부산 초량으로 이전하였다. 윤상은은 빼앗긴 은행 경영권을 되찾기 위해 낙동강 하류의 맥도를 개간하여 2천 석 토지를 만들어 자본을 확보한 뒤 1917년 최대 주주가 되고 전무를 맡았다. 이후 윤상은은 마산과 하동에 지점을 설치하고, 부산진에는 출장소를 두었다. 1918년에는 조선인 지주들이 설립한 주일은행을 합병하면서 자본금 100만 원의 은행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해 임시 정부가 만들어지자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으로 있던 조카 윤현진이 참가하면서 윤상은의 상해 임시 정부 자금 지원도 계속되었다. 윤상은은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자 은행 경영에서 물러난 후 1920년에 큰아들 윤인구와 큰딸 윤연숙을 데리고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3년간 청강생으로 유학하였다. 유학 시절 유억겸, 최승만, 김준연 등에게 매년 50엔씩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같은 동기생이었던 김도연과의 인연도 이때 맺어졌다.

1923년 귀국한 윤상은은 다시 은행 경영을 맡았다가 1925년에 물러났다. 고향 구포로 돌아온 윤상은은 대리권농공제조합(大里勸農共濟組合), 온돌 개선, 색의(色衣) 착용 운동 등 사회 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구포면 협의회원[1931년], 구포시장확장기성회 위원[1932년], 동래군학교비평의회원[1932년], 구포청년단 고문[1936년], 구포면민대운동회 회장[1940년] 등 구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말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심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3. 해방 후 활동

해방 후 미군정기 김병규 경상남도 지사의 권유로 경상남도 재무부장[1945년 10월 16일~1946년 11월 30일]을 맡았다. 이때 조세 징수, 적산 문제 처리, 금융조합 등 많은 현안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큰아들 윤인구가 국립 부산대학 설립 운동을 추진하자, 일본 유학 시절 인연을 맺었던 유억겸(兪億兼)[당시 미군정청 문교부장]의 도움으로 1946년 5월 15일 설립 인가를 받는 데 기여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재무부장관이던 김도연의 추천으로 전매국[현 전매청] 국장[1948년 12월 20일]을 맡았다. 전매국장 시절 연초와 홍삼 전매권 문제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전매국장직에서 경질되고 신탁은행 감사역이 되었으나, 1952년 6월 퇴임하고 구포로 돌아왔다. 1984년 9월 25일 구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윤상은은 1979년 『나의 회고록』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는데, 회고록에는 일대기와 여록, 가훈을 함께 실었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산18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6년 일한 상품 박람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였다. 1958년 10월 24일 한국일보사 구포총국에서 주최한 ‘오복을 갖춘 가정, 화목스러운 가정, 덕망이 높은 가정’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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