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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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2497
한자 崔致遠
영어음역 Choe Chiwon
이칭/별칭 고운(孤雲),해운(海雲),문창후(文昌侯)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710-4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권덕영

    [상세정보]

    성격 학자|문장가
    성별
    본관 경주
    출생 시기/일시 85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868년 - 당나라로 유학
    활동 시기/일시 874년 - 당나라 빈공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879년 - 「격황소서」 지음
    활동 시기/일시 885년 - 통일 신라로 귀국
    활동 시기/일시 894년 - 「시무 십조」 올림
    추모 시기/일시 1022년 - 문창후 추증, 국자감과 향교에 배향
    출생지 경주 사량리 - 경상북도 경주시
    수학|강학지 국자감 - 중국 하남성 낙양
    사당|배향지 동래향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235지도보기
[정의]
남북국 시대 부산 지역의 해운대(海雲臺)를 명명한 신라의 학자 겸 문장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아버지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의 중창 사업에 참여한 최견일(崔肩逸)이고, 형은 해인사 승려 현준(賢俊)이다. 당제(堂弟)는 헌강왕(憲康王) 대 견당 사절단의 녹사(錄事)였던 최서원(崔栖遠)이다.

[활동사항]
최치원(崔致遠)[856~?]은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경문왕 8년(868)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874년 외국인 대상의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지금의 강소성 율수현]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황소(黃巢)의 난[875~884]이 일어나자 회남 절도사 고병(高騈)의 종사관으로 나가 「격황소서(檄黃巢書)」[토황소 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29세 때인 헌강왕 11년(885)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 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 벼슬을 받았다. 하지만 왕실 귀족들의 경계와 질시로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부성군(富城郡)[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태수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하정사(賀正使)로서 당나라에 한 차례 다녀왔다. 진성 여왕 8년(894) 어지러운 정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임금에게 「시무 10조(時務十條)」를 올려 채택되고, 아찬 관직을 받았으나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개혁이 무산되었다.

최치원은 당에서 익힌 학술과 식견을 바탕으로 큰 뜻을 펼치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자,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의 산천을 노닐며 책 읽고 시 짓는 일로 소일하였다. 최치원이 전국을 방랑할 때 부산의 바닷가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동백섬 인근 바위에 자신의 자(字)를 따서 ‘海雲臺’라는 글씨를 새겼다. 해운대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당나라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유학과 사장학(詞章學)에 뛰어났고,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에도 이해가 깊었다. 최치원이 지은 책은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 복궤집(中山覆簣集)』, 『금체시(今體詩)』, 『오언 칠언 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사륙집(四六集)』, 『제왕 연대력(帝王年代曆)』,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법장 화상전(法藏和尙傳)』,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명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불리는 「성주사 낭혜 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영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초월산 대숭복사비(有唐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등의 글씨도 최치원이 썼다. 이 가운데 『계원필경』과 『법장 화상전』, 사산비명의 내용만이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상훈과 추모]
고려 현종 14년(1022)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받았고, 국자감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부산에서는 동래 향교에서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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