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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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2997
한자 河鯉泳
영어음역 Robert A. Hardie
이칭/별칭 하리영(河鯉泳)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상규 1

    [상세정보]

    성격 의료 선교사|목사
    성별
    대표경력 협성신학교 교장
    출생 시기/일시 1865년 6월 11일연표보기 -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898년 - 목사 안수 받음
    수학 시기/일시 1886년 -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입학
    수학 시기/일시 1890년 -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활동 시기/일시 1890년 9월 30일 -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청년연합회의 파송으로 내한
    활동 시기/일시 1890년 10월 - 제중원 임시 원장으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91년 4월 - 제중원 임시 원장 퇴임
    활동 시기/일시 1891년 4월 14일 - 부산 세관 직원 전용 의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898년 - 남감리회 선교부로 이적
    활동 시기/일시 1900년 이후 - 복음 전도자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3년 이후 - 한국 교회 부흥 운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감리교 최초의 신학 전문지인 『신학 세계』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한국에서 은퇴
    몰년 시기/일시 1949년 6월 30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캐나다 온타리오 주 할디만
    학교|수학지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 캐나다 토론토
    활동지 부산광역시
    활동지 강원도 원산시
    활동지 서울특별시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캐나다 출신의 의료 선교사이자 부흥 운동가.

[활동 사항]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1865~1949]는 1865년 6월 11일에 캐나다 온타리오 주(Ontario) 할디만(Haldiman)에서 태어났다. 하리영(河鯉泳)이라고도 불리었다. 로버트 하디의 초기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칼레도니아(Caledonia)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마친 후 잠시 교사로 일한 바 있으며, 1886년에는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2학년 재학 중 학생 자원 운동[SVM]의 영향을 받아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한국 선교사였던 토론토대학교 출신인 제임스 스카트 게일(James Scarth Gale)의 영향을 받았다. 로버트 하디는 1890년 봄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고,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을 받아 그해 9월 30일에 내한하였다.

로버트 하디가 내한했을 때는 제중원 원장 헤론이 이질로 사망[1890년 7월 26일]한지 두 달이 지난 때였고, 후임 의사 빈톤(Dr. C. Vinton)이 내한하기 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버트 하디는 빈톤이 내한하기까지 제중원에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1891년 4월까지 약 6개월 간 제중원의 임시 원장으로 일하였다. 그 후 영국인 세관원 헌트(J. H. Hunt)[하문덕(河文德)]의 초청으로 1891년 4월 14일 부산으로 와 부산 세관 직원 전용 의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1892년 11월 18일에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기까지 19개월간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부산을 떠난 후 1898년 남감리회 선교부로 이적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00년부터 의료 활동보다는 복음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1903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부흥의 역사에서 로버트 하디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해 로버트 하디는 한국 교회 부흥을 촉발한 위대한 부흥의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며, 동시에 1903년 이후 한국 교회 부흥과 영적 지도자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서울에서 감리교의 협성신학교 교장 혹은 교수로 활동하면서 구약 신학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1916년에는 감리교 최초의 신학 전문지인 『신학 세계』를 창간하였는데, 이를 통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문필가로서 혹은 신학자로서 활동하였다. 193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44년간 한국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던 로버트 하디는 1949년 6월 30일 84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상과 저술]
로버트 하디는 신학적으로 비평학을 수용하는 복음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감리교 계통의 협성신학교에서 일하였으나 반드시 알미니안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로버트 하디는 보편적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고 선교지에서 기독교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복음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로버트 하디는 많은 글을 남겼는데, 『신학 세계』 창간호에서부터 성경을 소개하고 주석을 집필하였고, 『웨슬레의 일기』, 『웨슬리의 도리적(道理的) 강도』[1918] 등의 책을 통해 감리교 신학을 소개하고자 힘썼다.

특히 1920부터 1934년에 걸쳐 성서 고고학, 구약 개론, 구약사, 모세오경, 예언서 등에 관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신명기 법전」과 「제사 법전」은 매우 중요한 논문으로 간주되었다. 또 양주삼(梁柱三)·도이명(都伊明)·김인영(金仁泳) 등과 함께 한국 감리교 구약 연구에도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이외에도 『신약 총론』[1918], 『구약 총론』[1921] 등 성경 개설서, 주석적 논문과 성경 연구법 등에 대한 글을 남겼다. 『기독 신보』에 「구신약 강해」라는 글을 약 100회 연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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