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동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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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238
한자 土城洞城-
영어의미역 Site of Toseong-d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1가 25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연심

    [상세정보]

    성격 성터
    지정면적 9,900~13,200㎡
    관리자 부산광역시 서구청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3년연표보기 - 도갑현향경(都甲玄鄕卿)이 지표 조사 실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06년 - 부산고등여학교 건립으로 파괴 시작
    소재지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5
[정의]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에 있는 삼국 시대의 토성 터.

[개설]
토성동 성터가 있는 토성동은 그 이름에 알 수 있듯이 토성이 있었기 때문에 토성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토성은 아미동에 있었던 옛 화장터 부근을 중심으로 하여 아미골 아래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와 가야 때의 성은 주로 반월형으로 성을 쌓았고, 그 이후부터 방형(方形)의 축성법으로 바뀌었는데, 토성동 토성은 신라나 가야 때의 성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토성동 토성은 조선 시대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서 쌓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무렵 왜구가 부민포[오늘날의 충무동부평동 바닷가에 있는 포구]로 들어와, 보수천을 따라 올라서 구덕령을 넘어 구포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길목이 오늘날의 토성동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일본인이 쓴 『초량화집(草梁話集)』에는 임진왜란 때 시마즈군[도진군(島津軍)]의 진이었다고 한다.

[변천]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오늘날의 중구서구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당시 부산 각처에 흩어져 있던 공동묘지를 그 당시는 외진 곳이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아미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화장터가 조성될 당시 토성의 흔적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토성동 토성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일본거류민단(日本居留民團)이 부산고등여학교[부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건립할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후 토성초등학교 등의 건물이 들어서면서 토성의 흔적이 사라졌다.

[위치]
토성동 성터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토성중학교 일원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토성동 성터는 1913년에 실시한 지표 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지표 조사 담당자는 일본인 도갑현향경(都甲玄鄕卿)이었는데, 당시 조사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축조된 일본식 성이 아니라 삼국 시대의 고성(古城) 양식이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또한 토성동 성터는 아미동에 있었던 옛 화장장[1948년에 당감동으로 이전] 부근을 중심으로 아미골 아래쪽에 반월형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내 면적 9,900~1만 3200㎡, 성의 높이 1.2~1.5m가량 되는 삼국 시대의 토성지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현황]
도시화로 인해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사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정밀 지표 조사를 실시하여, 성곽의 범위와 잔존 성벽의 유무를 확인하여 토성동 성터의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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