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군 작대

대표시청각
button
관련항목 페이징
  • URL Copy
  • twitter
  • facebook
항목 ID GC04203349
한자 僧軍作隊
영어의미역 Military Corps of Buddhist monks
이칭/별칭 승작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용출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등에 편성된 승군 부대.

[개설]
조선 후기 각처의 산성을 비롯한 관방 시설을 방어하는 주요 병력으로 승군이 편제되었다. 먼저 지휘자로 승장(僧將)을 임명하고, 일반 승도(僧徒)로 승병(僧兵)을 조직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후기 각처의 산성을 방어하는 주요 병력으로 승군 작대(僧軍作隊)를 편제한 일이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산성이나 오지의 관방 시설에 상주하여 지킬 수 있는 병력을 민간에서 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승군을 편성하였다.

[관련 기록]
『숙종실록(肅宗實錄)』 54권 숙종 39년[1713] 8월 11일 기사에는 판결사(判決事) 이정신(李正臣)이 동래부 금정산성(金井山城)의 이해득실을 논한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다. 금정산성의 파수 군병으로 동래·기장·양산 소속의 경외(京外) 각 아문 소속 군병을 획급해 줄 것, 더불어 산성 안에 있는 두 사찰, 곧 국청사(國淸寺)·해월사(海月寺)의 승도 100여 명뿐 아니라 인접한 범어사(梵魚寺)의 승도 약 300명, 주변 세 읍에 속한 각 사찰의 승도 수천 명을 모두 합쳐 대오를 편성하고 장부를 작성할 것, 곧 승군 작대를 요청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승군을 모아 성곽의 방어 병력으로 삼자는 승군 작대에 관한 건의는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의 군총조(軍摠條)에 기재되어 있는 승군 작대의 군총은 316명이다. 이정신의 건의에 비하면 규모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내용]
이정신의 건의에 따라 1713년(숙종 39) 금정산성의 승군 작대가 설치되었다.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인 1703년(숙종 29)에 건립된 국청사해월사는 산성 승군 작대의 승영(僧營)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1718년(숙종 44)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축성 역이 완료되었을 때, 성곽의 축조에 참여한 승려들을 작대(作隊) 편성한 일이 있었다. 적상산성의 승군 작대는 산성을 지키는 수호 승군(守護僧軍)이었고, 승장으로 하여금 승군 작대의 승병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임의로 흩어지지 못하게 하였다.

1786년(정조 10)에는 영조 대 무신란(戊申亂) 당시 반군이 모여들었던 속리산의 요해처(要害處)를 방어하기 위해 승군을 편성한 일이 있었다. 속리산의 승도들이 승역(僧役)의 무거움 때문에 이미 흩어져 버린 상태이었기 때문에 따로 승군 잡역을 감면해 줘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처럼 승군 작대에 속하는 승군에게는 승역이 감면되는 혜택이 따랐다.

[변천]
처음 부산 금정산성의 승군은 국청사·해월사에 상주하는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금정산성 승군 작대의 실제 편성 규모는 700명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래 부사를 지낸 권이진(權以鎭)이 이곳의 승군과 장교(將校)의 수를 합쳐 약 800명으로 파악한 것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459책, 숙종 37년 2월 21일 기사].

1740년(영조 16)에 편찬된 『동래부지』의 군총조에 316명으로 기재된 것은 승군 작대의 규모가 축소된 이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1868년(고종 5)의 『동래부 사례(東萊府事例)』에 따르면, 승군 작대의 규모가 다시 101명의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 그나마 19세기 후반에는 금정산성의 승영이 크게 위축된 상태이었으므로, 이 무렵 동래부의 승군 작대는 더 이상 금정산성 승군을 위주로 운영될 수 없었다.

[의의와 평가]
승군 작대를 통해 조선 후기 사찰의 사회 경제적 기반과 승역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0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집필항목 검색 닫기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참고문헌 검색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