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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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385
한자 孫重行
영어음역 Son Junghaeng
이칭/별칭 손풍산(孫楓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순욱

    [상세정보]

    성격 시인|언론인
    성별
    대표관직|경력 『부산 일보』 논설 위원
    출생 시기/일시 1907년 3월 15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음악과 시』에 「거머리」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이운공립보통학교 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31년 3월 - 『불별』에 동시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조선 중앙 일보』 초계지국 기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 조선문학가동맹 진주지부 서기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연합신문사 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국제신보사 업무국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부산 일보』 편집국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민주신보사 이사 겸 총무국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부산 일보』 상임 논설 위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경상남도 문화상 수상, 『부산 일보』 논설 주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동남풍』 발간
    몰년 시기/일시 1973년 1월 9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합천 -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
    거주|이주지 부산 - 부산광역시지도보기
    수학|강학지 초계보통학교 -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 87-2
    수학|강학지 대구고등보통학교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9
    수학|강학지 경남공립사범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신안동 380
    활동지 이운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55
    활동지 연합신문사 - 서울특별시
    활동지 국제신보사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활동지 부산일보사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지도보기
    활동지 민주신보사 - 부산광역시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언론인.

[활동 사항]
손중행(孫重行)[1907~1973]의 다른 이름은 손풍산(孫楓山)이다. 1907년 3월 15일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초계리에서 출생하여 초계보통학교[현 초계초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3월 경남공립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거제 이운공립보통학교[현 거제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0년대 말 손풍산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조선 일보』와 계급주의 사상의 아동지 『별나라』에 활발하게 글을 투고하였다. 계급주의 사상이란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 농민 계급의 투쟁을 정당화하고, 독려하는 주의나 사상’을 말한다.

1930년 계급주의 문학을 표방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기관지 『음악과 시』에 「거머리」를, 1931년 3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발행한 동요집 『불별』에 동시 5편을 발표하였다. 1932년 고향 합천으로 내려가 조선중앙일보 초계지국 기자로 일하면서 농민 조합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당시 손중행은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원고를 스스로 불살랐을 정도로 계급주의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진한 탐미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대륙적인 스케일의 늠름한 기상으로 토호(土豪)의 불의도 눈감아 주지 않은 고거(固拒)의 정신으로 일관하였다”는 작가 이주홍(李周洪)의 평가가 손중행 시의 성격을 뒷받침한다.

1937년 무렵 손중행진주로 옮겨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았다. 그 때문인지 이 시기에 쓴 시를 찾기 어렵다. 1945년 9월 김병호(金炳昊), 권환(權煥), 박석정(朴石丁), 신고송(申鼓頌), 엄흥섭(嚴興燮) 등 경상남도 출신의 계급주의 문인들과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5년 1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진주지부 서기장이 되었으며, 좌파[계급주의, 급진주의] 아동 잡지 새동무 진주지사를 운영하면서 역시 좌파 성향의 종합지 『민우』를 발간하였다.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이 주관한 전국 문학자 대회 초청자 213명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손중행은 광복 초기의 역동적인 문단 활동을 뒤로 하고, 1949년 언론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 시작은 광복기 들어 급작스럽게 우파 지식인으로 변모한 양우정(梁又正)이 대표로 있는 연합신문사 입사였다. 양우정이 『불별』의 필진이었던 교분을 배경으로 연합신문사 이사로 입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무렵부터 손중행은 계급주의 의식을 내면화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1952년 부산으로 옮겨 1952~1953년 국제신보사의 업무국장, 1953~1956년 『부산 일보』 편집국장, 1957~1958년 민주신보사 이사 총무국장, 1958~1962년 『부산 일보』 상임 논설위원과 논설 주간, 1964년 『부산 일보』 주필 겸 이사를 지내면서 필봉을 휘둘렀다. 1967년 『부산 일보』의 인기 칼럼이었던 ‘동남풍’의 글들을 모아서 발간한 『동남풍(東南風)』에서 언론인 손중행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생애 전반기는 문학인으로, 후반기는 언론인으로 살았던 손중행은 1973년 1월 9일 67세로 부산침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현재 확인된 손중행의 시는 30편에 안 된다. 10여 편의 단문이 있기는 하지만 문학적 이력이 40년을 훌쩍 넘는 것을 고려하면 과작(寡作)임에 틀림없다. 저서로 『부산 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동남풍』[부산일보사, 1967]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제1회 경상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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