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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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418
한자 東萊邑城址
영어의미역 Site of Dongnaeeup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칠산동|안락동|명장동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집필자 나동욱,윤용출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9월~12월연표보기 - 복천박물관이 복천동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0년 5월~7월연표보기 - 복천박물관이 칠산동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8월~10월연표보기 - 경남문화재연구원 발굴 조사 실시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6월 26일연표보기 - 동래읍성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동래읍성지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성격 성곽 터
    지정면적 1.5~3m[높이]|3,600m[둘레]
    소유자 부산광역시 등
    관리자 부산광역시 동래구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복천동~칠산동~안락동~명장동에 축조된 고려 말, 조선 후기 동래읍성의 터.

[개설]
동래읍성은 동장대(東將臺)가 있는 동래고등학교 뒤쪽의 망월산정에서 서북쪽으로 마안산을 거쳐, 서장대(西將臺)가 있는 동래 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 지역 시가지 중심의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평면 말각방형(抹角方形)의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이다. 둘레가 약 3.6㎞에 이르나 현재 1,962m 정도가 확인된다. 동래읍성과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원수 박위(朴葳)가 우왕 13년(1387) 8월 19일 축성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는데 석축으로서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소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세종 28년(1446)에 석축 둘레 3,092척, 높이 15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폐성된 조선 전기의 동래읍성이다.

[변천]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던 동래읍성은 1731년(영조 7) 당시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1월 3일에 성터를 측량,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4월에 성벽을, 5월에 성문을, 7월에는 문루(門樓)가 각각 완공되었고, 8월 19일에 낙성되었다. 이때 쌓은 동래읍성은 둘레 5,187m, 여장 1,318타(垜), 서문, 남문, 암문(暗門)이 있고,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문지 좌우에 사각형으로 돌출하게 쌓은 치성(雉城)의 다른 이름]을 두고 문은 전문[세병문(洗兵門)]과 후문[주조문(朱鳥門)]이 있어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서문·암문·북문 밖에는 옹성(甕城)[문지 바깥을 반원형의 성벽으로 두른 구조물]을 부설하였다.

성을 쌓을 때 동래를 비롯하여 양산·기장·김해·울산·언양·밀양 등지의 농민과 노비, 군인 등이 동원되었으며, 경상 감사 관할 64군에서 징발된 승군 7,091명, 동래의 동서남북 4소(所)의 사병 8,199명을 포함하여 총 5만 2003명이 동원되었다. 성내에는 수성창(守城倉)을 두어 쌀을 보관하고, 수첩정(守堞廳)을 두어 수성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후 1735년(영조 11)에 각 5칸으로 된 보루 15개소와 인화문을 건립하였고, 1740년에 남문 및 문장청을 개창하고, 1870년에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다시 성벽과 문루를 수축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시가지 계획에 따라 서문과 남문 사이의 성벽이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망월산을 중심으로 한 산지에서 성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위치]
동래읍성지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복천동, 칠산동, 안락동, 명장동 일대로, 성벽은 복천박물관 뒤쪽 북장대를 중심으로 서쪽 서장대와 동래향교 동쪽으로 이어져 동래구청 뒤쪽으로 연결된다. 동쪽으로는 인생문과 동장대를 거쳐 동래고등학교를 지나 수안 로터리 안쪽으로 연결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 고려 후기~조선 전기의 동래읍성

동래읍성은 동래구 복천동 304번지에서 주택 신축과 관련하여 확인되었는데, 2002년 9월~12월 복천박물관이 길이 30m의 성벽을 확인하였다.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기단부 정도만 남아 있었다. 기단부의 축조 수법은 외벽 쪽에 높이 약 70㎝까지 돌로 채워 기초부를 보강하고, 그 위에 넓고 얇은 지대석(地臺石)과 지대석 끝에서 30㎝ 안쪽에 대형의 성벽 기단석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한편 내벽은 외벽으로부터 600㎝ 안쪽에서 확인되며, 황갈색 마사토와 갈색 점토 위에 가로 30~35㎝, 세로 35~40㎝ 크기의 삼각형의 석재로 세로쌓기하여 3~4단 정도 쌓았다.

외벽에서 내벽 쪽으로 400㎝ 되는 지점에 외벽 쪽으로 면을 맞추어 세로로 모쌓기[종평적(縱平積)]한 또 하나의 선행된 석축이 조사되었다. 이것은 석축으로부터 성안 쪽으로 약 600㎝ 지점까지 잡석이 분포하며, 그 하부 생토층에서는 연약한 지반을 다지기 위한 직경 7㎝ 내외, 길이 50㎝ 내외의 말목(抹木)이 30㎝ 내외의 간격으로 촘촘히 박혀 있거나 말목이 부식되어 구멍만 남아 있는 것도 조사되었다. 석축과 말목 구멍은 앞서 조사된 내벽의 안쪽 아래층에 위치하며, 말목이 분포한 곳까지 잡석이 분포되어 있는 점과 상부의 성벽과 너비가 같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상부의 석축성보다 선행된 석축 성벽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은 성벽 하부와 내벽의 안쪽 다짐토 아래층에서 인화문(印花文) 분청 대접과 인화문호(印花文壺) 조각이 다량 수습되어 고려 말기의 석축성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경주 장흥고의 분청사기로 보이는 ‘경(慶)…고(庫)’ 등의 명문 자기편도 출토되어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축성 기록과 그 시기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한편 2005년 4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사가 들어설 예정 지역에 대한 공사 전 입회 조사에서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해자가 확인되어 세 차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수안역사 부지에는 현 지표 아래 3m에서 너비 540~570㎝, 높이 170~250㎝ 정도 규모로 동래읍성의 해자가 남문 방향으로 이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차 조사에서는 10구 이상의 인골·칼 4자루·활·화살촉·청동 숟가락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고, 2차 조사에서는 온전한 철제 비늘 갑옷[찰갑(札甲)]과 투구 등 임진왜란 때의 전투 상황과 참상을 보여 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2. 조선 후기의 동래읍성

동래구청의 도시 계획 도로 개설과 관련하여 2000년 5월~7월 복천박물관동래구 칠산동 332-1번지 일원의 인생문 북쪽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동래읍성의 동쪽 산지의 성 외벽은 지대석(地臺石)의 배치 없이 깬 돌의 안쪽으로 잡석 채움을 한 후 그 안쪽은 흙다짐하여 쌓은 편축(片築)[성벽의 외면만 석축하는 기법] 성벽임이 확인되었다. 성의 너비는 5.3m로 추정되었고, 잔존 높이는 1.5~3.0m로 상부 폭이 2.4m 내외이다.

또한 2003년 8월~10월 경남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인생문 북쪽에서 성벽과 치성(雉城)[성벽에 붙은 적을 사살하기 위하여 원형이나 방형으로 성벽에 붙어 쌓은 성]을 확인하였다. 성벽은 내탁식 편축(內托式片築) 성벽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의 너비는 620~670㎝ 정도로 조사되었다. 치성(雉城)은 성 외벽 하부를 판축상으로 다져 지대를 조성한 후 반원형으로 지대석을 돌리고 그 위에 한 변 길이 420㎝의 사각형 성벽을 덧붙인 것이다. 성 외벽 돌은 할석으로 쌓은 것에 비하여 치성은 가공한 돌을 사용한 점, ‘기사삼월(己巳三月)’, ‘신미오월(辛未五月)’ 명문 기와가 이곳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1749년(영조 25)을 전후한 시기에 증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2005년 3월~4월 동래구청 뒤편을 조사한 결과, 평지의 성벽의 너비는 530~600㎝로 조사되었다. 성벽은 생토면을 굴착한 후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대로 다져 지대를 조성한 후 외벽에는 기단석 없이 가로 80㎝, 세로 40㎝ 크기의 치석된 할석으로 옆줄 눈을 맞추면서 안쪽 180㎝까지 잡석으로 뒷채움하고, 내벽은 1단 정도 확인되는데 외벽에 비해 조잡한 편이다. 외벽 바깥쪽 뻘흙에서 연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말목(抹木) 구멍이 조사되었으며, 수구(水口) 2곳이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조선 후기 백자편과 기와편으로, 기와 중에는 ‘성와(城瓦)’ 명이 있는 암키와편이 출토되었다. 이들 중에는 상단에 단이 진 유단 암키와편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와 동일한 기와가 망월산정, 서장대의 조사에서도 출토되었는데, 18~19세기의 유물로 추정되며 유단 암키와의 경우 이제까지의 성곽유적에서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성에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북문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서장대와 동쪽으로는 북장대, 인생문, 동장대에 이르는 성벽과 문루,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다. 원래의 성벽은 북장대 동쪽의 마안산 체육공원에서 인생문 직전까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충렬사 서쪽에 복원된 성벽 하부에서도 원래의 성벽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아래쪽의 성벽은 민가의 축대로 사용되거나 지하에 매몰되어 있으며, 동래고등학교의 앞 도로 건너편에서도 그 흔적이 조사된 바 있다. 한편 북문지 안쪽에는 동래의 역사를 전시하는 동래 역사관과 장영실 과학 동산이 조성되어 있고, 도시철도 수안역사 안에는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해자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동래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복천동 304번지에서 확인된 고려 후기 및 조선 전기의 동래읍성 벽을 확인한 것은 조선 시대 변박(卞璞)의 기록화인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1760년, 육군박물관 소장]에서 보이는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실체를 밝히게 된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발굴된 지점은 「동래부 순절도」를 통하여 볼 때 북문지 주변으로 보이며,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범위는 학소대(鶴巢臺)를 동북쪽으로 끼고 돌아 현재의 남문 지역을 통과하는 평지 읍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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