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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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556
한자 全秉哲
영어음역 Jeon Byeongcheo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대로 777[부전동 50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가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학생 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926년 9월 9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4년 - 부산제2상업학교에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울산 비행장 근로 작업에 동원되어 태업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체포되어 7개월 수감
    몰년 시기/일시 2010년 6월 12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4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군 하남면 남전리
    학교|수학지 부산제2상업학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503-15지도보기
    활동지 울산 비행장 건설 현장 -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전병철(全秉哲)[1926~2010]은 1926년 9월 9일 경상남도 밀양군 하남면 남전리에서 태어났다. 1944년 울산 비행장 건설 근로 작업에 강제 동원되었을 때 부산제2상업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강제 노동 동원지에서 일제의 부당한 대우에 반발하여 태업을 주도하였다.

1940년대 이후 일본의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고, 물자와 노동력이 심각하게 부족해지자 일제는 학생들의 노동력 강제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은 주로 비행장 건설과 군수 공장 등에 강제 동원되었다. 1944년 9월 초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의 4, 5학년 전원이 2개월간의 장기 근로 동원령으로 울산의 비행장 확장 공사와 부수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다.

당시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에 주어진 작업량은 1개월분이었고, 이것을 마치면 다시 1개월분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작업을 일찍 마치면 곧 귀가시킨다는 도급제였다. 그러나 부산에서 몇 번이나 속은 적이 있던 학생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인 관리자는 하루 작업량을 정해 놓고 그것을 마치면 일찍 보내 주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겨우 1개월의 작업량을 3주일 정도로 집중해서 마치고, 새로 배당된 1개월분도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자는 처음 1개월분이 반개월분이라서 아직 반개월분이 남아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9월 28일에 2개월분의 작업량이 끝나서 29일 귀가하면 10월 1일의 추석을 집에서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평소에 제공하는 식사량의 부족, 외출 금지의 해제, 면회 허가, 입욕 허가 등을 요구한 것이 시정되지 않은 점과 아울러 석식의 엄청난 감량에 대해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먹던 밥그릇을 집어 던지고 다음날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일본인 관리자 측은 회의를 열어 주모자를 퇴학시키는 것 등을 모의하였으나, 이를 미리 파악한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전부 부산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워낙 사람이 귀한 현장에서는 약 10일을 단축하여 작업을 끝내고 귀가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사방이 일본군으로 둘러싸여 있던 현장에서 일치단결하여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일이 끝난 것은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전병철이 주도한 것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학우들에게 일본군에 지원하지 말라고 종용하는 활동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45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2010년 6월 12일 8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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