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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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630
한자 蹈鞴津
영어의미역 Dobijin Military Bas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근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
    관련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일본서기(日本書紀)』
    비정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고대 왜장 가츠라기 소츠히코[葛城襲津彦]가 진을 친 곳.

[개설]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왜에 볼모로 간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고 왜인에게 살해되자, 왜는 탈출한 미사흔을 잡으려고 왜의 장수 가츠라기 소츠히코를 보내었다. 소츠히코가 대한 해협을 건너 다다른 곳이 타타라노츠[도비진(蹈鞴津)]이었다. 실성 이사금이 복호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질(質), 고대에 나라 사이의 외교적 신뢰를 위해 서로 교환하던 사절]로 파견하였는데, 눌지 마립간이 즉위한 후 박제상을 파견하여 두 아우를 구출하였다.

먼저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구출한 박제상은 다시 왜로 가서 미사흔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박제상은 왜에 들어가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하였으나 왜왕이 의심하였다. 백제인으로 먼저 왜에 들어간 자[백제의 태자 전지(腆支)로 추정]가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왕의 나라를 도모하려고 한다고 참소하였으므로,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하게 하였다.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巡邏軍)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으므로, 왜왕은 이에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다.

또한 신라 왕이 미사흔박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박제상을 정말 신라를 배반한 자로 여겼다. 이에 [왜왕은] 군사를 보내 장차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박제상미사흔을 장수로 임명하는 한편, 향도(嚮導)로 삼아 해중(海中) 산도(山島)에 이르렀다. 왜의 여러 장수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신라를 멸한 후에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데려 오자”라고 하였다. 박제상이 그것을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하자, 왜인이 이를 보고 딴마음이 없다고 여겨 기뻐하였다.

이에 제상은 미사흔에게 슬그머니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는데, 어떻게 혼자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박제상이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나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니, 미사흔박제상의 목을 껴안고 울며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다음 날 박제상미사흔이 멀리 갈 수 있는 시간을 벌려고 늦게 일어났다. 여러 사람이 묻기를 “장군은 어찌 이처럼 늦게 일어납니까?” 하니, “어제 배를 타서 몸이 노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미사흔이 도망한 사실을 알아챈 왜인들은 드디어 박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박제상을 왜왕의 처소로 돌려보냈더니,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 보냈다가 곧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운 후 목 베었다고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제상이 신라로 건너올 때 소츠히코를 딸려 보내었다. 함께 쓰시마[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서해 수문(鉏海水門)에 머물렀다.

이때 신라 사신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박제상] 등이 몰래 배와 노 젓는 사람을 나누어 미질허지(微叱許智)[미사흔]를 태워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미질허지의 침상에 눕혀 놓고 병이 난 것처럼 꾸며 소츠히코에게 말하기를 미질허지는 갑자기 병이 들어 죽을 것 같다고 하였다. 소츠히코가 사람을 시켜 병자를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속은 것을 알고는 신라 사신 세 명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가 불로 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로 가서 타타라노츠에 머물면서 초라성(草羅城)을 함락시키고 돌아갔다.”

[명칭 유래]
원래 도비(蹈鞴)란 제련로에서 쓰는 발풀무를 뜻하는 말인데, 이를 일본에서는 ‘타타라(たたら)’라고 읽었다. 이는 제철 기술과 관련된 말이다. 현재도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제련 기술을 ‘타타라 제철’이라고 하며, 이는 김해에 있던 가라국의 권역에 속하였던 ‘다다라(多多羅)’와 연관된 용어로 생각된다. 구야국[훗날 가락국]은 3세기 중엽 이미 철을 생산하여 주변 지역에 수출하였는데, 철을 일본 열도로 수출하는 포구(浦口)가 다다라이었으므로 일본에서는 고대의 제철 기술을 다다라와 연결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형성 및 변천]
도비진은 삼국 시대에 김해의 가라국에 속하였으며, 수나라(須那羅)와 함께 주요 읍락으로 일본 열도에 철을 수출하던 포구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가라국의 멸망과 더불어 수출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 왜구의 출몰을 감시하기 위한 수군이 주둔하는 포구로 다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다다라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로 추정된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금관 소경(金官小京)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 시대에는 김해부(金海府), 금주(金州) 등에 속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때 다대포에 천호(千戶)를 두고 부산포의 병선 3척을 속하게 한 것으로 보아 동래부의 관할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사부가 다다라원(多多羅原)에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이사부가 김해의 가라국을 칠 때 정벌한 네 개의 마을 중에도 다다라가 보인다. 그 밖에 도비(蹈鞴)가 포함된 인명으로 일본국의 건국 주로 알려진 신무 천황(神武天皇)의 왕비이자 대삼륜신(大三輪神) 혹은 대물주신(大物主神)의 딸인 원도비오십령원명(媛蹈鞴五十鈴媛命)이 있다. 인명 속의 도비를 ‘다다라’로 읽는다고 명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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