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에 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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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640
한자 津江兵庫
영어음역 Sseuehyogo
이칭/별칭 진강병고(津江兵庫),진강병고조(津江兵庫助),평성태(平成太),고원원좌린 충숙거사(高(源院佐隣忠肅居士),진강병고량(津江兵庫亮),진강병고지개(津江兵庫之介),진노강병고(津ノ江兵庫),진지강병고(津之江兵庫),진노강병고개(津ノ江兵庫介),진강성태(津江成太),진강병고조성태(津江兵庫助成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순순

    [상세정보]

    성격 관리
    성별
    대표관직 왜관 이관차왜
    출생 시기/일시 1612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1년 2월 - 왜관 이관차왜 정사로 부산에 옴
    몰년 시기/일시 1672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79년 - 추모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09년 - 추모비 건립
    부임|활동지 두모포 왜관 - 부산광역시 중구 수정동
    묘소|단소 장수원 - 일본 장기현 대마시엄 원정 일길
    추모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관련 유적 용두산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용두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왜관 이전 교섭을 위해 조선에 온 일본 쓰시마 번의 관리.

[개설]
쓰에 효고[津江兵庫][1612~1672]는 1671년(숙종 12) 2월 왜관 이관차왜의 정사로 부산에 건너와 두모포 왜관의 이전을 논의하였다. 여러 사료에는 쓰에 효고의 이름이 평성태(平成太)[다이라], 진강병고조(津江兵庫助), 진강병고량(津江兵庫亮), 진강병고지개(津江兵庫之介), 진노강병고(津ノ江兵庫), 진지강병고(津之江兵庫), 진노강병고개(津ノ江兵庫介), 진강성태(津江成太), 진강병고조성태(津江兵庫助成太) 등으로 적혀 있다.

[활동 사항]
쓰에 효고는 에도 시대[江戶時代] 쓰시마 번의 무사로, 1612년(광해군 4)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일 강화 회담이 재개되어 절영도에 임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이후 국교 재개 분위기가 고조되고, 외교 사절과 상인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두모포에 정식 왜관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두모포 왜관은 남풍을 직접 받는 지형이어서 선창에 수책(水柵)을 세웠어도 평상시에도 배를 육지로 끌어 올려놓아야 할 만큼 위험하고 불편한 곳이었다. 게다가 외교관의 왕래와 무역량이 늘면서 배를 대기 편리하고 규모가 큰 왜관이 필요해졌다.

이에 일본 쓰시마[對馬] 측은 두모포 왜관을 연 지 약 33년 만인 1640년(인조 18) 조선 정부에 왜관 이전을 것을 요청해 왔다. 이후 쓰시마 번에서는 30여 년간 8차례 이관차왜를 보내 왔다. 조선 정부는 거절로 일관하다가 1673년(현종 14) 왜관을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1678년(숙종 4) 초량에 새 왜관을 지었다. 이후 두모포 왜관은 구관 또는 고관, 초량 왜관은 신관으로 불리었다.

쓰에 효고는 1671년(숙종 12) 2월 제6차 이관차왜 정사로 부산에 왔다. 부사는 세이산지[西山寺]의 승려 겐조(玄常)였다. 당시 쓰에 효고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가 조선의 예조 참판 앞으로 보내는 서계(書契)[외교 문서]를 지참하고 왔는데 거기에는 왜관을 옮겨야 할 이유 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첫째, 관우가 좁고 궁벽하다는 점, 둘째, 토사가 쌓여 파도가 쳐서 배를 대기 불편하다는 점, 셋째, 왜관이 조일 양국 이 오래도록 국교를 유지할 만한 요충지가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조선 측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국방상의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이에 쓰에 효고는 접위관의 접대도 거부하고, 두모포 왜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동래부에서는 “왜관의 이전은 조선의 국정과 관계되는 중대사이자 임금이 조정 대신들과 협의를 하여 결정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중앙에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전하였다. 이에 이관차왜 일행은 상경하여 국왕 및 대신들과 직접 담판을 짓고 싶다며 왜관을 뛰쳐나가 동래부까지 난출(闌出)하는가 하면 왜관의 이전을 허락하지 않으면 동래에서 늙어 죽겠다고 공공연히 맹세하는 등 협박을 하기까지 하였다. 1671년(현종 12) 10월 파견된 제7차 사절인 평성지(平成之)도 쓰에 효고를 만난다는 구실로 왜관을 이탈하였다.

이처럼 왜관 이전을 둘러싸고 양국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두모포 왜관에서 큰불이 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쓰에 효고가 동래부 객사에서 쓰러졌다. 이판사(李判事)라는 조선 의사가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고, 일본인 의사 2명이 이판사의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하는 등 양국의 의료진이 힘을 썼으나 쓰에 효고는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쓰에 효고의 시신은 소금에 절여져 쓰시마로 보내졌다. 쓰시마 번 측은 동래부에 버티고 있던 나머지 이관차왜 일행도 불러들였다.

쓰에 효고의 죽음에 대해 분노를 이기지 못해 화병으로 죽었다고도 하고,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며 할복자살 또는 독살되었다는 얘기도 돌았다. 하지만 쓰시마의 주요 인물을 정리한 『대마 인물지(對馬人物志)』에는 “독살 등 속설이 있지만 일본의 책이나 조선의 『이관 등록(移館謄錄)』 등에 의거하여 전후 기록을 살펴보면 독살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동래부 객사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당시 쓰에 효고의 나이는 60세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후 쓰시마 번에서는 제7차 이관차왜로 두모포 왜관에 머물렀던 평성지와 제8차 이관차왜 평성령(平成令)을 보내 왜관 이전 교섭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1673년(현종 14) 9월 조선 정부가 초량에 새 왜관을 짓기로 함으로써 30여 년을 끌었던 왜관 이전 교섭은 마무리되었다. 조선 정부가 왜관을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옮기기로 한 것은 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 쓰시마 도주와 맺은 강화 조약] 이후 누적되어 온 대일 정책상의 문제들을 재정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묘소]
쓰에 효고의 시신은 관례에 따라 쓰시마 장수원(長壽院)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쓰에 효고의 법호(法號)는 고원원좌린충숙거사(高源院佐隣忠肅居士)이다. 쓰시마 번에서는 쓰에 효고를 왜관 이전 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자로 생각하였다. 개항 후 부산에 건너온 일본인들에게는 중세 왜관과 근대 일본의 전관 거류지를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인물로 여겼다. 부산의 일본 거류민들은 쓰에 효고를 개항 이후 부산의 일본인 사회를 탄생시킨 원조로 기억하기 위해 1879년(고종 16) 두모포 왜관이 있었던 고관 언덕에, 1909년(순종 3) 용두산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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