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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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660
한자 安龍福
영어음역 An Yongbok
이칭/별칭 안용복(安用卜)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오인택

    [상세정보]

    성격 어민
    성별
    활동 시기/일시 1693년 -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 주장
    활동 시기/일시 1696년 -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 주장
    추모 시기/일시 1957년 11월 - 안용복 장군 기념회 설립
    추모 시기/일시 추모 시기/일시 - 2011년 3월 26일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좌천동
    활동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지도보기
    관련 유적 수강사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수영 사적 공원
[정의]
조선 후기인 1693년(숙종 19)과 1696년(숙종 22)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주장한 부산 출신의 어민.

[활동사항]
안용복(安龍福)숙종 대 사람으로 현재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좌천동에 거주하였다. 신분은 사노비였으며,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였다. 당시 좌천동에는 초량 왜관으로 이주하기 전의 왜관인 두모포 왜관이 있었다. 이러한 주거 환경 덕분에 안용복은 일찍이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동래부에 설치된 경상 좌수영의 수군 병졸로서 전선의 노를 젓는 병졸이었으며, 어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 및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주장한 인물로서 조선 후기 『성호사설(星湖僿說)』의 기록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안용복은 다른 어부들과 함께 1693년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거기에 고기잡이하러 나온 일본 어부들과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다투었다. 이에 일본 어부들은 일본어를 할 수 있던 안용복과 또 한 명의 울산 어부 박어둔을 일본 돗토리 번으로 데려갔다. 일본 영토라고 생각한 울릉도와 독도에 조선 어부들이 잘못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증거로서 두 사람을 데려간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은 일본 관료들에게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라고 주장하고 일본 어부들의 불법적인 침입을 항의하다가 쓰시마와 왜관을 경유하여 동래 부사에게 인계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뱃길이 험하여 울릉도를 적절히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시켰지만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이 영유권을 포기한 섬이거나 무인도로서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안용복 일행의 조선 어부들과 충돌하였던 것이다.

안용복은 1696년 5월 고기잡이하러 울릉도와 독도에 갔다가 또 일본 어부들을 만나자 항의하여 돌려보내고, 스스로 조선의 관료라 사칭하고 10명의 조선 어부들을 인솔하여 일본의 돗토리 번에 가서 항의하였다. 당시 일본 막부는 1696년 1월에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인정하고 일본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금지한 상태였다. 이후 안용복은 강원도 양양으로 귀국해서 자수하여 정부의 조사와 귀양 처벌을 받았다. 불법으로 일본에 건너간 행위와 관료를 사칭한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

[상훈과 추모]
1957년 11월 부산에서 안용복장군기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수영구 수영 사적 공원안용복을 기리는 동상과 사당[수강사]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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