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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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661
한자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
영어의미역 Headquarters of Gyeongsangjwado Naval Force Commander
이칭/별칭 동래 수영,영좌 수영,내영,유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3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현구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 설치되어 경상 좌도의 해안 방어를 맡은 수영.

[개설]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경상 좌수영]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서 240여 년간 유지해 온 수군 기지의 본영으로 대일(對日) 관방 체제의 주역이었고, 동래 수영(東萊水營)·영좌 수영(嶺左水營)·내영(萊營)·유영(柳營)으로도 불렸다. 대일 외교의 관문 기능을 맡은 동래부와는 긴밀한 관계를 지니면서도 상호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부터 남해안 방어를 위한 수군 편제가 마련되었다. 세조 때 진관 체제(鎭管體制) 성립과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중요성을 감안하여 전임 수군절도사가 각기 좌우 해역을 나누어 맡음으로써 각기 좌수영과 우수영이 등장하였다.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은 특히 일본과 가까워 대일 방어를 위한 첨병격인 수군 지휘부이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주장인 정3품 무관의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경상 좌수사] 아래 부관 겸 참모장인 정4품의 우후가 있었고, 그 밖에 대솔 군관, 화사와 사자, 영리, 진무 등의 막료와 다수의 군직과 군졸을 두었다. 우후는 별도의 아문[중영]을 두고 수사를 보좌하였다.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 예하에 조선 전기에는 첨사영인 부산진과 10곳의 만호영을 두었다.

1544년(중종 39) 다대포가 첨사영으로 승격하였고, 18세기 중엽에 관하 3진[감포진·축산포진·칠포진]이 혁파되면서 칠진 체제가 이뤄졌다. 개항기인 1881년(고종 18) 해로 요충지로서 절영도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개운진과 서평진을 없애고 절영도진을 신설하여 6진 체제로 바뀌었다.

통상 좌수영 직속의 군선은 전선 1척에 병선 2척과 사후선(伺候船) 2척이 1선단을 이루는 4선단 체제이었는데, 주장인 수사가 타는 영1 전선의 선단은 사후선 3척과 정탐선 1척이 추가되었으므로 전체 군선은 20척 내외이었다. 군액은 시기에 따라 편차가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감관·선장·지구관·도훈도·군기 감관 같은 소수의 군교직과 승선하는 수군 병사가 제각기 포수·사부·능로군의 일을 분담하였다.

[관련 기록]
영지(營誌)로는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좌수영지, 18세기 말로 추정되는 좌수영지[『부산부사 원고(釜山府史原稿)』 수록], 1850년(철종 1)경 간행된 『내영지(萊營誌)』[일본 천리대학교 이마니시 문고본], 1894년(고종 31)에 간행된 『영남 영지(嶺南領地)』[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등 4종이 있다. 지도로는 『여지도서』와 『내영지』에 덧붙인 「좌수영지 지도(左水營址地圖)」와 「내영 지도(萊營地圖)」 2종,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의 「경상 좌수영 지도(慶尙左水營地圖)」와 「1872 군현 지도 경상 좌수영 영지 도형(1872郡縣地圖慶尙左水營營址圖形)」 2종, 영내 관청의 배치 상황을 잘 보여 주는 「경상도 좌수영 관아 배설 조사도(慶尙道尙左水官衙配設調査圖)」[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를 합쳐 5종이다.

영 자체의 문건으로는 18세기 말엽 경상 좌수사로 재임한 강응환(姜膺煥)이 엮은 『내영 정적(萊營政蹟)』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의 19세기 후반을 다룬 『경상 좌수영 계록(慶尙左水營啓錄)』, 『경상 좌수영 관첩(慶尙左水營關牒)』을 비롯하여 다수의 관련 문서가 남아 있다. 「경상도 좌수영 관아 배설 조사도」에 따르면 수사가 주재하는 상영 아래 동헌[3곳]과 내아, 비장청, 장관청[3곳], 수성청, 길청[2곳], 군관청[2곳], 영리청을 비롯하여 20여 곳의 군사 관련 부속 건물이 있었고, 군선이 정박하고 건조되는 선소[현재 선소 유허비(船所遺墟碑)를 세워 기리고 있음]와 우후가 주관하는 중영 아래에 별도로 9곳의 관아 건물이 포진하여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 좌수영성지(左水營城址)는 1968년 이래 사적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임진왜란 때 분전한 선열을 모신 25의용단(二十五義勇壇)과 독도 수호의 화신 안용복(安龍福) 장군을 기린 수강사(守疆祠)와 천연기념물 등이 있으며, 30여 기의 역대 좌수사 공적비가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되살리게 한다.

[변천]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은 처음 동래 부산포에 자리 잡았으나, 왜선의 정박처와 가까운 탓에 마땅치 않다고 여겨 늦어도 1481년(성종 12) 이전 무렵에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 나중에 경상 좌병영의 소재와 겹치는 등의 민원으로 이설(移設)이 수차례 논의되다가 임진왜란 무렵에 남촌[해운포, 현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으로 다시 옮겨 오지만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해운포의 수영은 선창이 비좁고 모래가 쌓여 해로에 지장을 주어 1636년(인조 14) 여건이 나은 감만포로 옮겼다. 그러나 감만포가 왜관과 가까이 있어 군사 기밀의 누설이 염려되어 1652년(효종 3) 남촌 옛터, 곧 오늘날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으로 되돌아와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에 따른 영이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현재의 좌수영성지의 토대는 대체로 이후부터 갖추어진 것이다.

성의 터전은 구릉을 낀 평산성 형태로 규모는 남북 279.6m, 동서 534m로 성벽의 총 길이는 1,480m, 내부 면적은 10만 9728㎡로 추산된다. 19세기 후반에는 문루 네 곳과 포루 외에 성내에는 상영과 중영으로 나눠 동헌을 비롯한 30여 개소가 넘는 부속 건물이 즐비하게 있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의 해방(海防) 체제의 한 축을 맡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은 개항 전 부산의 역사를 오롯이 보여 주는 터전이며, 일반 행정을 맡은 동래부와 함께 지역사 현장의 실상을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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