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신

대표시청각
button
관련항목 페이징
  • URL Copy
  • twitter
  • facebook
항목 ID GC04203695
한자 尹興信
영어음역 Yun Heungsi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23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태영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파평
    대표관직 다대진 첨사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진천 현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다대진 첨절제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4년 - 선무공신록권 원종 1등 공신에 책록됨
    추모 시기/일시 1765년 - 윤공단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추모 시기/일시 - 1766년
    추모 시기/일시 1772년 - 충렬사에 배향
    부임|활동지 다대진성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1동
    묘소|단소 윤공단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 1234지도보기
    묘소|단소 송공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지도보기
[정의]
임진왜란 때 다대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인종(仁宗) 때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윤임(尹任)이다.

[활동 사항]
윤흥신(尹興信)[?~1592]은 1582년(선조 15)는 진천 현감에 부임하였으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1592년(선조 25)에 다대진 첨절제사로 임명되었고, 부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이튿날 다대진성을 공격하였다. 윤흥신은 동생 윤흥제(尹興梯)와 함께 민·관·군을 독려하며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윤흥신의 순절 기록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윤흥신은 왜적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가 죽임을 당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宣祖) 때 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이 지은 『조망록(繰亡錄)』의 내용은 좀 더 구체적이다. “왜적이 성을 포위하자 힘껏 싸운 끝에 이를 물리쳤다. 이튿날 많은 수의 왜적이 쳐들어오자 군졸은 모두 도망쳤고, 윤흥신은 홀로 남아 온종일 활을 쏘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조(仁祖) 때의 학자 신령(申靈)이 쓴 『재조 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도적이 병사를 나누어서 서평포·다대포를 함락시켰다.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웠으나 피살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6월 25일 공포된 선무공신 녹권(宣武功臣錄券)에 원종 1등 공신으로 올려졌다. 1765년(영조 41) 다대포진 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포 객사 동쪽[현 부산유아교육진흥원]에 윤공단(尹公壇)을 조성하여 해마다 음력 4월 15일 제사를 올렸다. 지금은 다대동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제향하고 있다. 1766년(영조 42) 송공단(宋公壇)에서, 1772년(영조 48)부터는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충렬사에서 제향하고 있다.

9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집필항목 검색 닫기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참고문헌 검색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