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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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3771
한자 日本人共同墓地
영어의미역 Public Cemetery for the Japanese
이칭/별칭 다니마치 일본인 공동묘지,아미동 일본인 공동묘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1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교열

    [상세정보]

    성격 묘지
    지정면적 79,638㎡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06년 7월 25일 - 부산이사청령 제7호로 이전 공고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06년 10월 1일~1907년 5월 - 복병산에서 아미동으로 이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2년 8월 - 복병산을 일본인 공동묘지로 조차
    소재지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 19
[정의]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터.

[개설]
개항 후 부산의 일본인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반도에 거주하였던 일본인의 연간 평균 사망률은 약 2%로, 일본인 사회의 공동묘지, 화장장, 제장(斎場)의 수요도 당연히 증가하였다. 이에 부산부에서는 아미동으로 공동묘지가 이전되자, 1929년 1월 곡정 2정목[현재의 아미동 2가]에 부영(府營) 화장장도 신설하였다.

[변천]
부산에 처음으로 일본인 묘지가 있던 곳은 현재 용두산 공원의 북쪽에 있는 복병산이다. 1892년 8월에 묘지 조성에 관한 한일 양국 간의 계약이 성립되면서 복병산일본인 공동묘지로 조차되었다. 1906년 7월 25일 부산이사청은 이사청령 제7호에서 복병산일본인 공동묘지아미동(蛾媚洞)의 산록에 새로이 마련된 7만 9638㎡ 규모의 일본인 공동묘지로 이전할 것을 알리고, 같은 해 10월 1일부터 이전이 시작되어 1907년 5월에 완료하였다.

공동묘지를 이전하는 주된 이유는 당시 추진 중이던 부산 북빈 매립에 필요한 토사 채취와 부산 내에 일본인 사회의 성장에 따른 시가지 확장에 있었다. 여기에는 부산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의 반대가 있었는데, 공동묘지 이전에 소요되는 비용, 유족들의 정신적인 부담, 새로운 공동묘지 경영에 따르는 재정적인 부담, 거류지와의 거리 문제 때문이었다. 복병산이 있는 대청정(大庁町)에서 현재의 아미동에 해당되는 곡정(谷町)으로 일본인 공동묘지를 이전할 당시, 복병산의 일본인 묘지에 있었던 약 300여 기의 일본인 무연분묘(無緣墳墓)도 모두 이장되었다. 이중에 오래된 것으로는 17세기 중엽부터 겐로쿠[원록(元禄)] 시대에 해당되는 것이 56기, 1903년의 무덤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치]
일본인 공동묘지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산19번지에 위치한다.

[현황]
아미동일본인 공동묘지는 해방 후 6·25 전쟁을 거치는 가운데 피난민의 거주지 등으로 이용되면서 원래 모습을 잃게 되었다. 현재도 약 100여 기에 달하는 묘석들이 가옥 계단과 돌담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미동에 있던 부영 화장장도 1959년 당감동으로 옮겨 갔다.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피난민 주거지 일대는 2022년 1월 5일 부산광역시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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