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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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4010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부산 지역의 역사.

[연혁 및 행정 구역]
조선이 건국되어 1397년(태조 6) 동래현(東萊縣)부산진(釜山鎭)이 설치되면서 동래 지역은 행정적인 면 뿐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위치도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부터 창궐하던 왜구가 동래현·동평현(東平縣)·기장현(機張縣) 등을 침범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처럼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1405년(태종 5)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 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다시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동래현의 위상이 강화된 것이다.

1423년(세종 5) 부산포(釜山浦)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을 하는 왜인이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성종(成宗) 대까지 동래는 동래현을 중심으로 한 행정 중심지와 부산포의 좌수사영을 중심으로 한 군사 중심지로 이원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도 관찰사의 지휘 아래 편제되어 있었다.

동래현은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을 겪으면서 군사적 요충지로 부각되었으며, 외교적·경제적 비중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547년(명종 2) 동래현에서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방어 책임을 물어 한때 동래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99년 외교 거점의 중요성 때문에 다시 동래부(東萊府)로 승격되었다. 17·18세기에 동래부는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출항지 역할을 맡았다. 1896년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개편되었다.

1740년(영조 16) 동래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편찬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조선 후기 동래부의 행정 구역 안에 읍내면(邑內面)·동면(東面)·남촌면(南村面)·동평면(東平面)·사천면(沙川面)·서면(西面)·북면(北面)의 7면 22동 79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기장현에는 고려 말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조선 시대 이후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599년(선조 32) 동래에 합하여졌다가 1617년(광해군 9) 다시 현으로 독립하였다. 1653년(효종 4) 하미면(下味面)을 떼어 울산에 이관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이관과 병합을 되풀이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거의 되돌려 받았다.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1896년 경상남도 기장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1831년(순조 31) 당시의 사정을 보여주는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 따르면, 조선 후기 기장현의 행정 구역 안에 읍내면· 동면· 남면(南面)· 상서면(上西面)·하서면(下西面)· 하미면의 6면 34개 방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정치와 군사]
동래현 시기에는 현령(縣令)[종5품]· 훈도(訓導)[종9품]의 관원이 있었으며, 부산포에는 일본과의 업무를 전담하였던 왜학훈도(倭學訓導)[종9품]가 있었다. 그리고 역로를 관할하는 역승(驛承)[종9품]이 배치되었다. 동래 도호부 시기에는 행정 기구가 확장되고 도호부사(都護府使)[정3품] 밑에 보좌관인 판관(判官)[종5품]이 있었으며, 향교를 관리하고 지방 양반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던 교수(敎授)가 있었다.

수령(守令)의 임기는 1,800일[5년간, 뒤에는 2년 반으로 고쳐짐]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또 출신지에 부임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도 동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수령의 권력 남용과 토착화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교체되는 일이 많았다. 기장현에는 현감(縣監)[종6품]이 배치되었다. 기장현은 군사적 특수 지역으로 간주되어 한때 4품관을 제수하였으나, 곧 종6품으로 고정되었다.

부산 지역에는 조선 초기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설치되었다. 본래 동래현 부산포에 있었으나 그 후 울산 개운포(開雲浦), 동래 해운포, 감만이포로 옮겨 다녔다. 1652년(효종 3)에 다시 해운포로 옮겨와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으로 경상좌수영이 혁파되어 동래부에 통합되기까지 유지되었다. 경상좌수영은 부산포·다대포(多大浦)·서생포(西生浦)·개운포·두모포(豆毛浦)·서평포(西平浦)·걸이포(乞伊浦) 등의 속진(屬鎭)을 관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 지역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군사 전략상 요충지로서 중요하게 여겨진 곳이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 지배층은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동래 지역에 새로운 관방 체제를 수립·시행하고 관방 시설을 축조해 나갔다. 1655년(효종 6) 동래부를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 경주 거진(巨鎭)으로부터 분리해 독진(獨鎭)으로 승격시켜 동래 부사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며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토록 하고, 금정산성(金井山城)과 동래부 읍성을 수축하는 등 군사 시설을 강화시켜 나간 조치들은 모두 이 같은 입장에서 취해진 것이다.

1739년(영조 15) 동래 부사가 수성장(守城將)을 겸하도록 하였다. 예전에 경상좌병영에 속했던 동래부의 속오군·아병 및 기장과 양산 두 고을의 군병을 모두 본부로 소속시키도록 조처한 것이다. 동래 부사가 독진 겸 수성장(獨鎭兼守城將)이 되었으며, 동래·기장·양산의 육군을 직접 훈련하고 유사시에 대비하는 체계는 한말까지 유지되었다.

[사회와 경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난 동래현의 호구는, 389호에 1,400명이고,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는 290호 2,416명이다. 이러한 호구 통계는 실제 인구의 일부만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호구는 약 1,200호, 7,000명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더 많은 인구 관련 자료가 남아 있다. 실록, 읍지 등의 통계를 통해 확인되는 동래의 호수는 17세기 말 7,818호, 1740년 5,641호, 1789년 7,007호, 1832년 7,190호, 1871년 7,662호 1899년 6,728호였다. 그리고 인구수는 17세기말 2만 6,067명, 1740년 1만 9,099명, 1789년 2만 8,864명, 1832년 3만 2,158명, 1871년 2만 7,329명, 1899년 2만 7,275명이었다. 이 통계 수치는 실제 인구에 비해 과소평가된 것으로 보이므로, 추정 호수는 약 7,521~1만 946호, 추정 인구수는 약 2만 7,284~5만 3,597명으로 볼 수 있다.

17세기 말~1748년의 동래부의 인구수는 17세기 말에 비해 크게 감소하였다. 특히 1740~1748년 무렵, 전국에 불어 닥친 자연재해, 기근, 전염병 등으로 대규모의 사망자와 유민이 발생하고, 그 영향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는데, 동래의 일시적인 인구수 감소도 이러한 당시 사정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1908년에 작성된 해운대 『동하면 호적(東下面戶籍)』에 따르면, 가옥은 모두 초가였으며, 기와집[와가(瓦家)]은 1채도 없었다. 1904년 『동래군 가호안(東萊郡家戶案)』에서도 동래군 8개 면[읍내면·서하면·사상면·사중면·동평면·남하면·남상면·동상면] 4,779호 가운데 기와집은 89호[1.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18~20세기 초 동래의 지배적인 가옥 형태는 초가였으며, 기와집의 비중은 극히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기장현의 호수와 인구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74호에 397명으로, 『경상도지리지』에는 174호에 1,01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759년(영조 35)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3,064호에 1만 1,581명으로, 1832년(순조 32)의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에는 2,687호에 1만 630명으로, 1855년(철종 6)의 『기장현 읍지』에는 2,726호에 1만 25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호구 통계는 동래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제 인구의 일부만 등재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世宗)동래현의 경지 면적은 전답을 합하여 1,723결인데, 이 가운데 논[수전(水田)]이 62%에 해당하는 1,068결이고 밭[한전(旱田)]이 38%인 655결이다. 18세기 중엽 영조(英祖) 대의 동래부의 전답은 약 1.9배 증가한 3,236결이고, 이 중 논이 68%, 밭은 32%에 달해서, 논의 비율이 더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동래는 다른 고을에 비하여 논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기장현의 경우,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에 반영된 경지 면적은 730결이었다. 18·19세기의 지리지·읍지 등의 자료에 따르면 기장현 양안에 등재된 원장부(元帳付) 결수는 변함없이 2,402결[논 1,552결·밭 850결]을 유지하였으나, 경작지로 등재된 시기결(時起結)의 면적은, 1759년(영조 35)의 『여지도서』에 1,710결, 1832년(순조 32)의 『경상도 읍지』에 1,644결, 1855년(철종 6)의 『기장현 읍지』에 1,679결로 기록되었다. 동래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체 경작 면적은 조선 전기에 비해 크게 증대하였으며, 논이 차지하는 비율도 역시 높은 편이다. 1855년(철종 6)의 『기장현 읍지』의 경작지 면적 가운데 논 1,187결, 밭 492결이어서, 논 70.7%, 밭 29.3%의 비율을 보인다. 동래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들어 수전화(水田化) 추세가 강하였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동래현의 토산 공물은, 1425년(세종 7)의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밤[황률(黃栗)], 노루 가죽[장피(獐皮)], 사슴 가죽[鹿皮(녹비)], 전자리상어 가죽[점찰피(占察皮)], 개암나무 열매[진자(榛子)], 목기(木器), 어피(魚皮), 상어[사어(沙魚)], 말린 조개, 살쾡이 가죽[이피(狸皮)], 여우 가죽[호피(狐皮)], 소탕(篠蕩), 표고(票藁), 귤, 석류, 오해소(吾海召), 미역, 우뭇가사리, 참가사리, 김, 생포(生鮑), 진복(鎭卜)], 건록(乾鹿), 건장(乾獐), 녹포(鹿鋪), 약재[방풍·천문동·맥문동·후박·녹용·생지황] 등이다. 속현인 동평현의 토산 공물에는, 꿀, 촉밀(燭密), 참기름, 들기름, 미역, 추자, 밤, 지초(芝草), 종이, 아교[어교(魚膠)], 전포(全鮑), 상어 가죽, 말린 조개, 김, 우뭇가사리, 청각, 황합(黃蛤), 해삼, 대구어, 청어, 방어, 표고 등이다.

『경상도지리지』에 실린 기장현의 토산 공물은, 들기름, 촉밀, 우모(牛毛), 개암나무 열매, 밤, 돼지털, 아교, 전포, 종이, 노루 가죽, 여우 가죽, 전자리상어 가죽, 어피, 표고, 말린 조개, 상어, 김, 참가사리, 약재[맥문동·방풍] 등이다.

조선 후기 동래부의 군액은 크게 증가하였다. 1780년(정조 4) 동래부의 군액은 영(營)이나 부(府), 6진(鎭)의 군교·이속 및 각색 군액을 합하여 1만 2,081명에 달하였다. 당시 동래부의 남정 1만 5,178명 중 노약·병폐자, 유교(儒校)·출신(出身)과 군공자를 제외한 8,059명이 이를 감당하고 있었다.

1806년(순조 6)에는 수포방군(收布防軍) 1,574명, 수포유황군(收布硫黃軍) 300명, 속오군·아병·봉군·파발군·목자 등이 3,320명, 충익위(忠翊衛)의 선무군관(選武軍官)·진상군(進上軍)·탄군(炭軍)이 73명, 좌수영 및 각 진포(鎭浦) 수군이 2,188명, 각종 명색의 보인·장인·악공 등이 612명, 향교 및 각 아문 소속이 611명, 왜관의 연향청 소속이 130명, 각 청 무사 군졸 및 삼반(三班) 관속이 1,950명으로 모두 9,760명이었다. 남정 수는 1만 4,641명에서 면역자 8,111명을 제외하면 응역(應役) 남정은 6,630명이었다. 무거운 군역 부담이 계속된 것이다.

18·19세기 동래는 읍세가 잔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국방상 요충지에 위치한 까닭에 군액이 크게 증가해 있었다. 수영과 휘하의 진보, 그리고 동래부 등 수군과 육군의 각종 관방 시설이 집중되었고, 동시에 이를 유지·운영해 나가는 데 필요한 외안부(外案付) 군액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폐단을 야기하여 민의 생활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부산 지역에서는 왜관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이 발달하였다. 당시 일본과의 무역은 정기적인 사행 무역이나 공무역이 있었지만 사무역이 더욱 활발하였다. 사무역은 조선 상인과 대마도의 상인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여기엔 바로 동래 상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무역 활동은 초량 왜관의 개시대청에서 열린 왜관 개시가 주 무대였다. 공무역과 달리 대부분의 거래 품목과 수량에 제한이 없었다.

[교통과 통신]
『경상도지리지』에는 세종 대에 이미 동평현석성(石城) 봉수대, 동래현황령산(黃嶺山) 봉수대, 간비오(干非烏) 봉수대가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황령산 봉수대부산포를 방수(防戍)하고, 간비오 봉수대는 해운대 만호진을, 석성 봉수대는 다대포 만호진을 방수하는 초소로서 임무를 맡았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의하면 그간 석성 봉수대가 폐지되고 새로이 오해야항(吾海也項) 봉수대가 신설되고 있으며 계명산 봉수대가 새로이 나타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1530년(중종 25) 다대포 두송산정(頭松山頂)의 응봉(鷹烽) 봉수대가 첨가되었다. 이처럼 중종(中宗) 대 이후 동래현 관하에 5개 처 봉수대가 있었다.

조선 초기 동래현에 설치되었던 신역(新驛)과 성산역(省山驛)은 뒤에 폐지되고 대신 휴산역(休山驛)소산역(蘇山驛)이 육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온정원(溫井院)· 언수원(彦樹院)· 사천원(沙川院)의 3개 원(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숙종(肅宗) 대 설치된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은 기장·양산 방면에서 동래를 거쳐 부산포에 오는 화물과 부산포에서 동래를 거쳐 양산 방면으로 운반하는 물품을 심검(審檢)한 곳이다.

[문화]
조선 전기의 성리학 보급과 정착은 부산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성리학 보급의 학문 기관으로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향교와 임진왜란 후 열사들을 추모하는 충렬사(忠烈祠), 그리고 이들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안락 서원(安樂書院)이 있다. 동래 향교(東萊鄕校)는 1392년(태조 1) 경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타 없어져 1605년(선조 38) 다시 지었다. 기장 향교(機張鄕校)는 1440년(세종 22)에 세워졌으나, 역시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1617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복원되었다.

충렬사임진왜란 때 전사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부산 첨사 정발(鄭發), 다대 첨사 윤홍신(尹興信) 등의 선열을 모신 곳이다. 1606년(선조 39)에 동래 읍성 남문 안에 세운 송공사단(宋公詞壇)이 시초가 되어 1624년(인조 2)에 충렬사에 사액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곳의 위치가 선열의 사당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하여 1652년(효종 3)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서원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안락서원은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을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읍성의 남문 안에 송공사(宋公祠)를 세웠던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1652년(효종 3)에 충렬사를 내산(來山) 밑 안락리(安樂理)에 옮기면서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 서원이라 하였다.

조선의 억불책에 따라 부산 지역의 불교 사원은 조선 초기부터 정비되었으며 축소되었다. 그러나 민간의 불교 신앙이 뿌리 깊게 존속하였던 데 힘입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산 지역은 바다를 배경으로 수상 교통·어업 등이 발달하고 있어 이를 둘러싼 민간신앙이 발달하였다. 특히 해안 지역은 이러한 민간 신앙이 뿌리 깊게 발전하고 있었다.

[대외 관계]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은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왕래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그 뒤 1407년(태종 7) 동래의 부산포와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를, 1418년(태종 18)에는 울산의 염포(鹽浦)에 정박하여 무역할 수 있게 하였다.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 1544년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으로 한때 통교가 중단되었다. 왜관(倭館)은 임진왜란으로 폐쇄되었으나, 1607년(선조 40) 부산항두모포에 새로 설치되었다가 1678년(숙종 4) 초량(草梁)으로 옮겼다.

왜관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주재원이 상주한 외교 기관이었으며, 이곳에서 외교적인 의례와 무역이 행해졌다. 조선 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 장군(幕府將軍)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 사절인 통신사(通信使) 일행은 부산 지역에 머물다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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