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 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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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4125
한자 草梁倭館
영어의미역 Choryang Waegw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신창동|중앙동|광복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중앙동,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일대에 있던 왜관.

[개설]
초량 왜관(草梁倭館)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 1607년(선조 40) 조성된 두모포 왜관에 이은 네 번째 왜관이다. 조선 후기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된 곳으로 대마도에서 온 500여 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하였다. 조선 전기 왜관에 가족을 동반하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금지되었다.

전체 초량 왜관의 경관은 가운데에 용두산 공원이 자리하고, 초량 왜관의 동남쪽에는 용미산이 있었다. 용두산 넘어 북쪽에는 복병산(伏兵山)이 있었다. 용미산은 일제 강점기에 깎여 평평해졌고, 그 후 부산부청(釜山府廳), 1996년까지 부산시청이 위치하다가 오늘날에는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서 있다. 용미산 북쪽으로는 선창이 있었고, 초량 왜관 담장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초량 왜관의 정문인 수문(守門)이 있었다. 담장을 따라 북쪽으로 더 가면 담장 안쪽으로 동향사(東向寺)가 위치하였다.

동향사를 끼고 돌면 오늘날 부산광역시 중구의 대청로가 나타나고, 이 길에 초량 왜관 북쪽 담장이 세워져 있다. 북쪽 담장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면 광일초등학교가 나오는데 그 앞에는 연향대청(宴享大廳)으로 들어가는 연향문(宴享門)이 서 있었다. 이곳에서 더 서쪽으로 가서 복병산 올라가는 비탈길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부산광역시 중구의 보수동 책방 골목 어귀가 보이는 사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초량 왜관 담장은 다시 남쪽으로 이어져 국제 시장을 지나 부산광역시 중구의 광복로와 만나게 된다.

광복로를 따라 동쪽으로 난 담장을 따라가면 남쪽 해안이 펼쳐져 있다. 초량 왜관 남쪽 담장 중간에는 부정문(不淨門)이란 문이 있었는데, 초량 왜관에서 사망한 일본인의 시신이 나가는 문이었다. 계속 동쪽으로 가면 초량 왜관 선창과 용미산을 만나게 된다.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왜관 부지가 약 33만 579㎡[10만 평]에 이르렀다.

초량 왜관 공간은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동관(東館), 서관(西館)으로 나뉘었다. 초량 왜관 안에 있던 건물의 명칭과 규모는 조선 측 자료와 일본 측 자료에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동관에서 대표적인 중심 건물을 동관 삼대청(三大廳)이라고 하고, 서관에도 서관 삼대청(三大廳)이 있었다. 동관·서관의 삼대청은 모두 조선에서 비용을 댄 건물이었다. 건물은 조선 목수와 일본 목수가 참여하여, 공동으로 조성되었다. 동관 삼대청은 초량 왜관 안에서 제일 큰 건물인 관수왜가(館守倭家)·재판왜가(裁判倭家)·개시 대청(開市大廳)이며, 서관 삼대청은 동대청(東大廳)·중대청(中大廳)·서대청(西大廳)이었다.

이 외 서승왜가(書僧倭家)[동향사]·통사왜가(通事倭家)·응방(鷹房)이 있었고, 공일대관왜가(公一代官倭家)·공삼대관왜가(公三代官倭家)·공대관왜가(公代官倭家)·공하대관왜가(公下代官倭家)·공대관왜 회계청(公代官倭會計廳)[이상은 공무역 및 일본 사절의 진상품 관리 담당], 판장관왜가(判掌官倭家)·지장관왜가(知掌官倭家)·별삼대관왜가(別三代官倭家)·별대관왜가(別代官倭家)·별대관왜 회계청(別代官倭會計廳)[이상은 매매 담당]이 있었다.

그리고 의왜가(醫倭家), 별금도왜가(別禁徒倭家), 도두금도왜가(都頭禁徒倭家), 도금도왜가(都禁徒倭家), 중금도왜가(中禁徒倭家), 소금도왜가(小禁徒倭家), 고삭 무역가(藁索貿易家), 소주가(燒酒家), 잡물 무역가(雜物貿易家), 주방(酒房), 목수왜가(木手倭家), 약재 무역가(藥材貿易家), 백당가(白糖家), 조포가(造泡家)[두부를 만드는 곳], 선격왜주인가(船格倭主人家), 병가(餠家), 점석가(簟席家)[다다미를 만드는 곳], 등매가(登每家), 공대관왜고(公代官倭庫), 별대관왜고(別代官倭庫), 송사왜고(送使倭庫), 고삭고(藁索庫), 물무고(物貿庫) 등 각종 창고가 있었다. 한편 수검청(搜檢廳), 포도막(捕盜幕) 등 치안 관련 건물이 있었다. 동관에는 무역과 일본인 생활에 필요한 공간이 많이 모여 있었다.

초량 왜관 밖에는 일본 사절이 오면 조선 국왕에 대해 숙배례(肅拜禮)를 하던 초량 객사(草梁客舍), 일본 사절을 위로하고 연향을 베푸는 연향대청, 역관 집무소인 성신당(誠信堂)·빈일헌(賓日軒)·통사청(通事廳), 왜관 고위 일본인의 땔감을 지급하는 탄막(炭幕), 공무역 물품으로 수출되는 공작미(公作米)를 두는 공작미고(公作米庫)와 부창(釜倉), 1709년(숙종 35)에 세워진 초량 왜관 설문(草梁倭館設門) 등은 초량 왜관 북쪽에 있었다. 초량 왜관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조선 군인이 있는 초소[복병막(伏兵幕)]는 초량 왜관 외곽에 세 곳이 있다가 1740년(영조 16)에 여섯 곳으로 늘어났다.

초량 왜관에서의 외교는 일본 측[대마번(對馬藩)]에서 연례 송사(年例送使)나 차왜(差倭)[일본 사절]가 오면 예조 참판, 예조 참의, 동래 부사, 부산 첨사에게 주는 외교 문서를 가지고 왔다. 일본 사절은 상경(上京)이 금지되어 서울에 가서 국왕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초량 객사에서 외교 의례를 거행하였다. 그 후 연향대청에서 접대를 받고, 외교 교섭을 진행하였다.

초량 왜관에서의 무역은 매월 3일과 8일, 월 6회에 걸쳐 개시 대청에서 이루어졌는데 양국 거래는 개시(開市)뿐 아니라 조시(朝市)도 있었다. 조시는 매일 수문 밖에서 열렸는데, 조시에 오는 상인은 왜관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부산진과 초량촌 사람이 많았다. 19세기에는 조시에 김해 지역 상인까지 참여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초량 왜관 일본인의 의생활은 ‘훈도시만 차고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왜관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니 견이나 명주를 착용할 것’, ‘남자 기모노 정장 차림’을 하도록 하는 것에서 일본식 전통 복식 차림을 하되 대마도에서보다 화려하였다. 검소하게 입는 검약령(儉約令)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음식은 초량 왜관의 상급 관리들은 전문 요리사가 있었겠지만, 여타의 일본인은 매일 아침 수문 밖에서 열리는 조시에서 생선·채소와 약간의 쌀을 구입하여 해 먹었다. 특히 초량 왜관 안에는 술집·떡집·두부 가게가 있었는데, 왜관 거주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일본 음식점이 개점한 것이다. 또한 초량 왜관 안에 다다미 가게, 염색 가게 등이 있어 일본인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일본식 건물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후기 부산의 왜관은 절영도 왜관에서 1607년 두모포 왜관으로 이전되었다. 두모포 왜관은 부지가 좁고 선창의 수심이 얕으며 남풍을 정면으로 받아 배를 정박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두모포 왜관이 좁아 일본 사절이 묵을 공간이 부족하여 가가(假家)를 계속 늘여 나갔다. 가가 세울 곳이 없을 정도로 공간이 부족하여 건물을 쇄신하고 선창을 수리하며 왜관 담장을 물려 공간 확대를 도모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이 크게 증가하면서 선창이나 무역선 안전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일본 측[대마 번]에서는 왜관 이전(移轉)을 요구하였다. 대마 번에서는 1640년(인조 18)에서 1673년(현종 14)까지 30여 년 동안 사절을 여덟 차례 파견하였다. 제6차[1671] 사절 정사(正使) 평성태(平成太)[츠에효고(津江兵庫)]는 조선이 이관(移館)에 대해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왜관을 벗어나 동래부로 향하였다. 그러고는 그해 12월 동래부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1673년 9월 이관이 결정되었다.

또한 왜관이 옮겨질 장소에 대해 일본 측은 처음에 부산진성을 주장하였으나, 조선에서 이미 군사 시설로 조성된 부산진성은 불가하다는 대답을 주었다. 일본 측에서 부산진성을 주장한 것은 조선 전기 사용하던 왜관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1659년(효종 10) 일본 측은 웅포(熊浦), 다대포(多大浦)도 좋고 그 외 다른 지역을 해도 된다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1673년 3월 조선에서는 웅포는 반대하였지만, 다대포 근처 지역을 한다면 이관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1673년 9월 부산 첨사는 일본 사절을 인솔하여 다대포·초량(草梁)·목장(牧場) 등 세 지역을 답사하였다. 다대포는 왜관을 두기에 좁고, 목장은 형세가 좋지 않으며, 초량은 선창은 좋으나 부지가 넓지 않다고 하였다. 세 곳의 후보지 중에는 초량이 가장 낫다고 판단한 일본 측에서 초량을 요청하였고 비변사에서도 이를 허락함으로써 이관 논의는 타결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두모포 왜관에서 밀무역, 불법 정보 누출 등 사례가 종종 발생하자 통제 시스템을 일신하기 위해서라도 왜관을 옮길 필요성이 있었다. 왜관의 신축 공사를 마치고 1678년(숙종 4) 4월 489명의 일본인이 초량 왜관으로 이전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왜관은 대마 도주의 임명을 받은 일본 사절, 관리와 상인 등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왜관 일본인 중 중요한 일을 담당한 사람을 왜관 사역(四役)이라고 부르는데, 관수(館守)·재판(裁判)·대관(代官)·동향사 승(東向寺僧)이다. 왜관 사역은 두모포 왜관 시기부터 활동하였고, 이러한 조직은 초량 왜관에서도 계속되었다. 왜관의 일본인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관수는 임기 2년으로, 왜관 업무의 주재자임과 동시에 왜관 체류 일본인을 통솔하였다.

재판은 조일 양국 간의 외교 업무나 교섭을 주관하였다. 동향사 승은 한문(漢文)을 익힌 지식인으로 외교 문서를 담당하였다. 대관은 조일 무역의 교섭과 결제 등을 담당하였다. 대관은 일대관(一代官)·이대관(二代官)·정대관(町代官)·별대관(別代官)·약재 대관(藥材代官) 등으로 명칭이 구분되는데, 무역의 유형에 따라 직무가 나뉘어 있었다. 그 외 조선어를 통역하는 역관, 정기적·부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외교 사절 등이 있었다. 관수가 파견되면서 왜관 내 조직이 정비되고, 조일 관계의 각 분야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 관리들이 파견되었을 것이나 언제부터 파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왜관 안에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왜관 업무와 관련된 조선인이 있었다. 일본 사절 접대, 조정에 왜관의 정황 보고, 외교 교섭 진행, 대일 무역 감독 및 총괄 보고 등 왜관과 관련된 행정의 책임자인 동래 부사가 있었다. 동래부에는 서계색(書契色), 오일색(五日色), 운미 감관(運米監官), 개시 감관(開市監官) 등 대일 업무와 관련된 직역자(職役者)가 있었다. 부산 첨사는 동래 부사와 함께 일본 사절을 접대하고 왜관을 출입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통제, 일본에서 들어오는 선박의 조사, 왜관에 지급할 물품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별도로 파견되는 접위관(接慰官)은 5품 정도의 관리로 경접위관은 서울에서, 향접위관은 경상도 도사(都事)나 경상도 지역의 군현 수령이 파견되었다. 왜관과 인접하여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은 서울에서 파견되는 훈도(訓導)와 별차(別差)가 각 1명, 부산에서 교육받은 하급 역관인 소통사(小通事)가 30여 명 있었다. 훈도와 별차 아래에 그들의 업무를 돕는 소동 30명, 사령(使令) 4명, 말을 관리하는 말지기[馬直], 땔감을 담당하는 시한(柴漢), 공문을 운반하는 발군(撥軍) 등이 있었다.

왜관 업무나 연향 때 사환(使喚)을 담당하는 관지기[館直] 30명, 예단을 담당하는 예단지기[禮單直], 다례(茶禮)나 연향 때 음식을 담당하는 숙수(熟手) 등이 있었다. 왜관 주변에 있는 복병막과 수문·설문(設門)에서 왜관 출입을 통제하는 조선 군인 등이 있었다.

[관련 기록]
왜관을 연구하는 데는 조선 측 사료와 일본 측 사료가 있다. 조선 측 사료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가장 기본이 되며,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같은 연대기 자료에는 초량 왜관 때 제정된 약조(約條), 절목(節目), 사목(事目)의 내용과 경위 등이 나타나 있다. 또한 외교를 담당한 예조(禮曹)와 그 소속 관청인 전객사(典客司)에서 만든 『춘관지(春官志)』·『변례 집요(邊例集要)』·『동문휘고(同文彙考)』 등 외교 자료집, 경상도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장계를 모은 『계본 등록(啓本謄錄)』, 역관이 편찬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통문관지(通文館志)』 같은 외교 자료집이 있다.

무엇보다 각 관청에서 전례(前例)를 적거나, 공문서를 등사(謄寫)하여 모아 놓은 등록류(謄錄類)가 30여 종 남아 있다. 차왜, 표류민(漂流民), 세견선(歲遣船)[일본 선박], 일본인 구청(求請), 무역 물품, 왜관 및 수리(修理), 외교 문서 서식, 왜관에서의 불법 행위 등의 주제로 나누어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왜관 상황은 물론 조선 후기 대일 관계를 조망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자료로는 『동래부 접대 등록(東萊府接待謄錄)』, 『고부 차왜 등록(告訃差倭謄錄)』, 『전객사 별등록(典客司別謄錄)』, 『별차왜 등록(別差倭謄錄)』, 『조위 차왜 등록(弔慰差倭謄錄)』, 『표인 영래 등록(漂人倭領來謄錄)』, 『왜인 구청 등록(倭人求請謄錄)』, 『세선 응련 등록(歲船鷹連謄錄)』, 『공작미 등록(公作米謄錄)』, 『왜관 수리 등록(倭館修理謄錄)』, 『서계 위식 등록(書契違式謄錄)』, 『징채 등록(徵債謄錄)』, 『왜인 작나 등록(倭人作拏謄錄)』 등이 있다. 그 외 접위관 신정(申晸)의 문집인 『분애 유고(汾厓遺稿)』, 동래 부사 이원정(李元禎)의 문집인 『귀암집(歸巖集)』,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의 문집인 『유회당집(有懷堂集)』 등 접위관 및 동래 부사를 지낸 사람들의 문집이 다수 있다.

일본 측 사료는 대마도에서 펴낸 종가 문서(宗家文書)가 대부분으로, 관수가 남긴 『관수 매일기(館守每日記)』, 무역을 담당한 대관이 남긴 『대관 매일기(代官每日記)』, 재판 차왜가 남긴 『재판 기록(裁判記錄)』, 각 사안별로 분류한 『분류 기사 대강(分類紀事大綱)』 등 왜관의 상황과 외교 현안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분류 기사 대강』은 18세기 중반 대마도에서 각종 기록을 항목별로 분류 편집하여 만든 것이다. 이 기록 가운데에는 ‘공목의 일[公木之事]’, ‘정축년 쌀 미수의 일[丁丑ノ年御買米未收之事]’, ‘서관을 수리하는 일[西館修理之事]’, ‘세 복병을 더 세우는 일[三伏兵加建之事]’, ‘조선 그림을 바라는 일[朝鮮繪 御所望之事]’, ‘두부옥에 도둑 든 일[豆腐屋江入候盜之事]’ 등 왜관과 직접 관련된 내용이 많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에는 부산에 절영도 왜관·두모포 왜관·초량 왜관 등 세 곳에 왜관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초량 왜관은 가장 오랜 기간 존속하였다. 약 200년간 존속하면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왜관은 양국 문인(文人)이나 지식인이 만나 필담(筆談)을 나누고 창화(唱和)를 하고, 미술품 등의 왕래 등 문화가 교류되는 곳이었다. 양국의 사람들이 만날 때면 왜관에서는 일본 향응 음식으로, 조선은 연향 음식을 내 놓아 음식 문화도 교류되었다.

조선인 특히 일상적으로 왜관을 출입하는 일본어 역관 중에는 조선의 전골과 비슷한 일본의 스기야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단오나 명절이면 동래 부사가 왜관의 관수에게 선물을 하는 등 양국의 풍속을 알아가는 장이기도 하였다. 양국의 지식인과 상류층의 교류뿐 아니라 일반민의 교류도 이어졌다. 왜관 일본인과 왜관 주변 조선인은 조시를 통해 매일 만날 수 있었으므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국가로부터 공인되지 않은 사적(私的) 거래, 왜채(倭債) 거래, 물주와 사환(使喚) 관계 형성 등 경제적 관계뿐 아니라 일상에서 여러 관계가 맺어졌다.

1876년(고종 13) 병자 수호 조규(丙子修護條規), 병자 수호 조규 부록(丙子修好條規附錄), 1877년(고종 14) 부산구 조계 조약(釜山口租界條約)에 의해 초량 왜관 터에는 1876년 근대 개항 후 일본 전관 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들어섰다. 일본 전관 거류지를 통해 근대 문화와 문물이 유입되고 이곳은 부산을 대표하는 신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혼마찌[本町]가 왜관 동관 자리에 들어서고 관수가가 있던 곳에는 부산의 일본인을 관리하는 최고 행정 기관인 부산이사청과 영사관이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에도 이곳의 중심성은 변하지 않고 부산부청이 들어서고, 행정·경제·물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전통적인 이 지역 중심지의 명칭인 동래는 구명(區名)으로만 남아 있고 부산(釜山)이 시명(市名)이 되었으며, 이곳에 중구(中區)가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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