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고읍성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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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4287
한자 東萊古邑城-
영어의미역 Site of Goeupseong Fortress in Dongnae
이칭/별칭 동래 고읍성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640|870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성격 비|기념비
    지정면적 비|기념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연표보기 - 동의대학교 박물관에서 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연표보기 -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소재지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640
    소재지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870
[정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동래 고읍성 터.

[개설]
동래 고읍성은 지금의 동래읍성이 동래구에 축조되기 이전에 해운포에 있었던 읍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고읍성은 해운포에 있는데 동남은 석축(石築)이고, 서북은 토축(土築)인데, 둘레가 4,130척이며 지금은 허물어져 폐성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해운포(海雲浦)는 사천(絲川)[수영강]의 유입처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배산의 동남쪽인 수영구 망미동 일대로 비정된다.

1960년대의 지표 조사를 통해 고읍성의 서문은 수영구 망미동 870번지, 북문은 망미동 640번지, 남문은 광안동 937번지, 관아의 위치는 구 국군통합병원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는 분지로 동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로부터 은폐가 가능하고, 남동쪽으로는 바다로 통하는 수영강과 인접해 있어 교통의 요지(要地)에 해당된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에 “현종 12년(1021)에 동래군성(東萊郡城)을 수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시기적으로 고읍성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고 있다.

[위치]
동래 고읍성 터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의 현 부산지방병무청부터 포스코 더샾 아파트의 동쪽 끝까지, 서쪽 도로 건너 같은 면적이 동래 고읍성의 전체 범위에 해당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동래 고읍성 터부산지방병무청 부지에 포함되면서 2002년 동의대학교 박물관이 시굴 조사를 실시하여, 토성 연장 96m와 우물 4개소가 조사되었다. 또한 포스코 더샾 아파트 건축과 관련하여 경남문화재연구원이 2003년에 시굴 조사, 2005년에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판축 토성 벽 135m가 조사되었다. 조사된 성벽은 내벽과 외벽의 기초부에 2~3단의 석축을 배치한 뒤 사질토와 점질토를 교대로 다져 축조한 기단 석축형 판축 토성(基壇石築型版築土城)으로, 초축(初築) 성벽의 너비는 8.7~10m로 조사되었다.

또한 초축 성벽의 상부로는 무너진 성벽을 L자 형으로 파낸 다음 2단의 석축을 배치한 뒤, 사질토와 점질토를 교대로 다진 너비 8.7~9.2m에 이르는 수축(修築) 성벽이 조사되었다. 성 외벽에는 마사토와 점토를 교대로 다지기 위한 판자를 고정하는 직경 20㎝의 나무 기둥 흔적이 길이 4~4.35m 간격으로 조사되었다.

내성(內城)의 벽 안쪽에는 너비 4~6m, 깊이 50㎝ 정도의 구상 유구(溝狀遺構)[물이 흐르는 고랑처럼 파여진 것]가 확인되었다. 그 외에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 터 2개동, 담장 터 1개소, 배수로 2기, 온돌 유구 2기, 고려 시대의 건물 터 1개동, 도기·기와 매납 갱군(埋納坑群) 1개소, 구하도(舊河道)[옛날 물이 흐르던 물길] 및 제방 1개소, 추정 보도(步道) 잡석렬 1기, 건물 터로 추정되는 석렬 4기와 구상 유구 4기, 폐기된 기와무지 5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그 중 통일 신라 시대와 관련된 건물 터, 담장 터, 배수로, 온돌 유구 들은 모두 정남향 및 정동향으로 배치되어 성 내부를 계획적으로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하도는 인위적으로 굴착과 준설을 한 점과 바닥면을 수평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아 집수지(集水地)로 추정된다.

도장 무늬 토기[인화문 토기(印花文土器)]와 중판(中板)[기와를 제작할 때 점토판을 두드리기 위한 중간 크기의 두드림 판]의 선(線) 무늬 평기와, 중판 복엽 연화문(重瓣複葉蓮花文)[이중의 연꽃잎을 꽃잎 사이에도 중복되게 표현한 무늬] 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로 볼 때 초축(初築)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 후기 전반[8~9세기]까지 시기를 올릴 수 있으며, 수축은 1021년(현종 12) 때 동래군성(東萊郡城)을 수축하였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읍성의 폐성 시기는 “원수 박위(朴葳)가 1387년(우왕 13) 8월 19일에 축성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동래성을 완공하였는데, 석축으로서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구상 유구에서 출토된 청자 상감 초문 임신 명(靑磁象嵌草文壬申銘) 접시의 제작 시기를 감안하면 1332년(충숙왕 1)부터 1387년(우왕 13)까지, 즉 14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고읍성이 폐성이 된 원인은 잦은 왜구의 침입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황]
현재 부산지방병무청과 포스코 더샾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건물의 외곽 성벽이 있던 곳은 원 상태대로 복구하여 잔디가 식재되어 있다. 부산지방병무청 북쪽에는 동래 고읍성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당시의 우물 2기가 복원되어 있으며, 서쪽의 도로 건너편의 동래 고읍성 터에는 일반 주택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 아직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동래 고읍성의 초축 시기가 8세기대로 소급될 경우 동래 고읍성은 현 동래읍성 이전의 동래군성으로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거칠산군(居柒山郡)을 동래군으로 이름을 고칠 때의 치소(治所)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 말기에 읍치를 현재의 동래읍성 지역으로 옮기기까지의 정치·사회적 배경에 대한 해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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