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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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4391
한자 金井山城西門
영어의미역 Seo-mun Gate in Geumjeongsa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13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영택

    [상세정보]

    성격 문루|성문
    양식 홍예식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2칸
    소유자 국유
    관리자 금정구청
    건립 시기/일시 1703년연표보기 -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808년연표보기 - 금정산성 서문 완성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4년연표보기 - 문루 축조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3년연표보기 - 복원
    현 소재지 금정산성 서문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133지도보기
    원소재지 금정산성 서문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133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부산 금정산성(釜山金井山城) 서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

[개설]
금정산성 서문(金井山城西門)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을 재건할 때의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다.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서문을 완벽하게 재건하고자 전국에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 관계인 두 석공을 찾았다.

정현덕은 스승에게는 금정산성 동문을, 제자에게는 금정산성 서문을 만들게 하였다. 야욕과 욕심이 많은 스승은 금정산성 동문을 웅대하게 지으려고 하였던 반면, 금정산성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을 앞세워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만들게 되었다. 스승이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칭송하였다. 이후 이들 사제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공사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치]
낙동강에서 북구 화명동대천천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 마을이 나오는데, 금정산성 서문은 산성 마을 입구의 북쪽 구릉지 해발 230m에 위치한다.

[변천]
금정산성 서문은 1703년(숙종 29)에 부산 금정산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1806년(순조 6)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래읍성의 배후 성지로서 금정산성의 경영을 요청하여, 1807년 가을부터 1808년 초봄까지 금정산성 남문을 쌓아 완성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금정산성 서문의 문루를 만들었는데, 성문 중에서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졌다. 그 이전에는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과 성문만 축조되고, 성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성문 위에 지은 초루(譙樓)와 ‘ㄷ’ 자 모양으로 조성한 성곽은 그 모습이 견고하고 아름다웠으며, 금정산성 서문을 통해 낙동강과 구포 김해 방면으로 왕래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방치되어 금정산성 서문이 허물어져 육축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형태]
규모는 육축 부분이 72.34㎡ 정도이고, 문루가 36.04㎡이다. 성문의 형식은 앞면과 뒷면 모두 홍예식([虹霓式)[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방식]으로 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의 어간을 좌우 협간보다 두 배 정도 넓게 잡았다.

금정산성 서문은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적군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좌우에 길이 5m, 높이 5m, 폭 4m 규모의 적대(敵臺)를 설치하였다. 수문은 대천천에 교량식의 홍예형으로서 높이 3m, 폭 2.5m인 3개의 수구(水口)를 마련하였는데, 그 모습은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현황]
금정산성 서문의 소유자는 국가이고, 관리자는 금정구청이다. 현재 예전과 다름없이 웅장한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금정산성 서문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부산 금정산성 4성문 중의 하나로서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되어 조선 시대 산성의 문루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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