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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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4428
한자 壬辰倭亂
영어의미역 Hideyoshi Invasion of Korea
이칭/별칭 임란,임진란,왜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상세정보]

    성격 전쟁
    관련인물/단체 송상현|정발|윤흥신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연표보기 - 부산진성 전투 개시. 동래 읍성 전투, 다대진성 전투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8년연표보기 - 종결
    전개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정유재란 발생
    발생|시작 장소 부산진성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좌천동 일대
    종결 장소 남해 - 경상남도 남해 앞 바다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부산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 벌인 전쟁으로, 1597년[정유년]에 일본군이 다시 침입한 전쟁을 구분하여 ‘정유재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진 앞바다에 침입하여 다음날에 부산진성을 침략하였다. 이후 동래부성과 다대포성 전투가 벌어졌다.

[역사적 배경]
조선과 중국·일본 세 나라는 14세기에 각각 새로운 정권을 맞으면서 차츰 안정되어 갔으나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명(明)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로 조선은 왜와 여진족 양쪽으로부터 차례로 침략당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6세기 말엽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등장하여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하였다. 그러나 세력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조선·명과의 교역상의 문제점을 군사력으로 타개하고자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게 되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국방에 소홀하였기 때문에 방위 체제가 허술하였다. 지배층은 일본 측이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는데도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군사력을 더욱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진력하였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은 20여만 명의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인솔한 제1번 대는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먼저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임진왜란 중 일본군과 치른 최초의 전투는 부산진성 전투였다. 4월 13일 일본군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조선 침략 선봉 제1군 1만 8700명의 대군은 700여 척의 병선으로 부산포에 침략해왔다.

부산진성의 민가는 300여 호로 군민을 다 합해도 실제 병력은 불과 1,000여 명이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첨사 정발(鄭撥)부산진의 군민들은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전투에서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개와 고양이까지도 죽여 버리는 잔혹함을 보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하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지역의 병권을 가지고 있던 경상좌병사의 군과 인근 군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성곽을 수호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경상좌병사 이각(李珏)과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도주하여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은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동래성을 세 방면에서 포위 공략하였다. 송상현이 지휘하던 동래부의 군민은 역시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적이 2005년 이후 부산 도시 철도 4호선 수안역사 건설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2011년 문을 연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에는 동래읍성 해자와 그 아래에서 발견된 동래부 군민의 인골, 무기류가 그대로 전시돼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참혹했던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일본군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하고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서울을 향해 밀고 올라왔다. 관군이 쉽게 무너지자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다.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이끈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도 그러한 승전의 하나였다.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전선을 크게 파괴하였다. 당시 이순신의 수군은 부산 부근의 서평포(西平浦)·다대포(多大浦)·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왜군 전선 24척을 격파한 뒤, 부산포 내의 일본군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1597년 일본군은 다시 쳐들어왔다. 재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모두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명군도 철수하였다. 7년간의 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
임진왜란은 조선·일본·명의 동아시아의 삼국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부산 지역은 임진왜란 최초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7년간의 전쟁 기간에 일본군의 지배 하에 놓인 채,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되었다. 그 때문에 부산 지역 주민에게 많은 희생이 강요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부산 여러 곳에 왜성(倭城)을 축조하였다. 증산성(甑山城), 자성대성(子城台城), 절영도성(絶影島城), 용미산성(龍尾山城), 구포의성(龜浦義城), 기장 죽성리성(機張竹城里城) 등이 그것이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부산 지역은 일본군의 침략과정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주민에게는 가혹한 경제적 수탈, 부역 노동의 징발 등 무거운 부담이 집중된 가운데, 수영(水營) 성민은 장기간 항전하였다. 부산 지역을 비롯한 국내 각 지역에서 전개된 임진왜란은 조선의 사회·문화를 변화시킬 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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