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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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5445
한자 都禮鍾
영어음역 Do Yejong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성격 사회주의 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출생 시기/일시 1924년 2월 25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7년 - 계림초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9년 - 서성중학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43년 - 서성중학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1년 4월 -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53년 4월 - 대구대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경상북도 일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남로당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3년~1955년 -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58년 12월 - 상주고등학교 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영주교육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61년 1월 -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 간사장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2월 -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조직위 부위원장
    활동 시기/일시 1964년 7월 -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 구금
    활동 시기/일시 1967년 8월 25일 -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74년 4월 20일 -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75년 4월 8일 - 사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75년 4월 9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 4월 9일경 - 4·9 통일 열사 추모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1월 - 인민혁명당 사건 재심 결과 무죄 판결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면 서악동
    거주|이주지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서성중학 - 일본 도쿄[東京]
    학교|수학지 대구대학교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내리리 15
    활동지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 - 대구광역시
    활동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인민혁명당 -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
[정의]
부산 지역에서 진보적 청년들을 지도한 사회주의 운동가.

[활동 사항]
도예종(都禮鍾)은 1924년 12월 25일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37년 대구 계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업에 종사하다가,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영수학원에 입학하여 1년을 수료한 후 서성중학에 진학하여 5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1946년 8월 초등학교 교사 시험에 합격하여 경상북도 봉월과 영주, 서부 등지의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48년에는 남로당에서 활동하였다.

1951년 4월 도예종은 대구대학 경제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53년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3년여 동안 대구대학 경제학과 조교로 재직하다가, 1958년 12월부터 상주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치 단체 교육감이 선출직으로 바뀌자 도예종은 영주 교육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지만 발령이 지체되어 결국 취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도예종은 4·19 혁명이 만든 정국의 중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것은 도예종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4·19 혁명 직후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진보적 청년층의 리더였던 도예종은 안경근, 김성달 등 항일 운동가를 중심으로 결성된 시국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이때 부산의 이종률(李種律)로부터 민주민족청년동맹[약칭 민민청]의 경북맹부 결성을 제안 받게 되었다. 민주민족청년동맹은 6월 12일 ‘청년층의 자주적 통일 운동’을 표방하고 부산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였다.

도예종은 서도원, 송상진 등과 함께 이듬해인 1961년 1월 4일 서도원을 위원장으로, 도예종을 간사장으로 하는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도예종민주민족청년동맹을 기반으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조직 업무를 총괄하였다. 동시에 이종률과 더불어 부산과 서울의 진보적 청년 학생들에게 지도성을 발휘하여 서울대학교를 필두로 하는 민족통일연맹의 결성을 지원하였다.

이로써 도예종은 4·19 혁명 시기 통일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나 이 때문에 5·16 군사 정변 이후 수배를 받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도예종은 통일 운동에 앞장섰던 청년들을 조직하여 평화 통일을 위한 비공개 단체를 결성하기 위한 활동을 추진하였다. 이에 1960년대 초반 도예종은 부산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활동 때문에 도예종은 1964년 7월 체포되어 ‘인민혁명당 사건’의 당수로 조작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1967년 8월 25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74년 4월 20일 도예종은 다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판결을 받은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1975년 4월 9일 새벽에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가한 고문을 숨기기 위해 시신은 가족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화장시켰다. 2007년 1월 대법원의 재심 결과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판명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저술 및 작품]
1961년 2월 8일부터 12일까지 「노동 운동과 통일 문제」라는 글을 『영남 일보』에 연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이후 매년 (사)4·9인혁재단이 주관하여, 도예종을 비롯하여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산화한 열사들의 ‘4·9 통일 열사’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시기는 4월 9일 전후이고, 장소는 현대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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