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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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05542
한자 萬德寺
영어의미역 Mandeoksa Temple
분야 종교/불교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구만덕로 63-25[만덕1동 32-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원영

    [상세정보]

    성격 사찰
    창건자 금산(金山)
    전화 051-337-6128
    건립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건립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1동 32-2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 있는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만덕사(萬德寺)는 현재 작은 사찰이지만 옛 절터를 보면 대규모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개국 공신인 노강필(盧康弼)과 이엄(李嚴)이 927년(태조 10)에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86년에 승려 금산(金山)이 만덕사지에 가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1352년(공민왕 1) 충혜왕의 서자였던 석기(釋器)만덕사에 유폐되었다고 한다. 당시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원나라 세력을 쫓아내고 원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힘에 의지하던 세력이 석기를 왕으로 세우고자 음모를 꾸몄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민왕(恭愍王)이 그들을 처단하고 석기만덕사로 귀양 보냈다. 이 같은 인연으로 이후 고려가 망하자 왕손들이 만덕사로 피난을 했다. 하지만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의 박해가 심해지자 고려의 왕손들은 성씨를 여러 가지로 바꾸어 가며 거제도와 합천 등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 대사 유정(惟政)만덕사에서 승군(僧軍)을 모으고 왜군과 유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일본에 전하는 『조선 정벌기(朝鮮征罰記)』에 따르면 승군들의 저항이 매우 심해서 침략한 지 2년이 지난 1594년(선조 27)에야 비로소 만덕사를 점령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정벌기』의 기록 외에는 만덕사와 관련된 연혁이 전해지지 않는다.

[관련 문화재]
만덕사는 대가람이었던 만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1972년과 1990년 말에 벌인 발굴 조사에서 삼층 석탑, 당간 지주, 국장생 석표(石標), 석주(石柱), 금당 터 등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중에서 삼층 석탑은 1972년 주변에 흩어진 탑재를 모아 복원하였는데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만덕사지 당간 지주(萬德寺址幢竿支柱)는 석주 2주 중 1주만 남아 있다. 높이 3.5m로 기단부는 파손되었으며 당간을 설치하던 간대는 석주 아래에 놓여 있다. 1972년 만덕사지 역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1990년 조사 때 확인된 만덕사 금당 터는 동서 68m, 남북 54m, 높이 4m의 직사각형 축대에 세워져 있었다. 이 축대 뒤편과 동북쪽, 서북쪽에도 건물이 세워졌던 흔적이 조사되었다. 당간 지주가 금당 터에서 약 150m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만덕1동 일대가 대부분 만덕사 경내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6월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새겨진 돌이 발굴되었으며, 인근에 흐르는 덕천천 너머 산등성이에서는 거대한 암석을 타원형으로 파낸 돌절구가 조사되었다. 이 대형 돌절구를 부근 마을에서는 예부터 ‘만덕사 떡구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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