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부립병원

대표시청각
  • URL Copy
  • twitter
  • facebook
항목 ID GC04205852
한자 釜山府立病院
영어의미역 Busan-bu Hospital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1가 1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성격 관립 의료 기관
    설립자 부산부
    설립 시기/일시 1877년 2월연표보기 - 부산제생의원 설립
    이전 시기/일시 1880년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1가에서 광복동 2가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36년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에서 서구 아미동 1가로 이전
    개칭 시기/일시 1885년 10월 1일연표보기 - 부산제생의원에서 부산일본공립병원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부산일본공립병원에서 공립병원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05년연표보기 - 공립병원에서 부산거류민단립병원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부산거류민단립병원에서 부산부립병원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6년 - 부산순치병원 합병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1가
    주소 변경 이력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2
    주소 변경 이력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1가 10
[정의]
근대 시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관립 의료 기관.

[설립 목적]
부산부립병원(釜山府立病院)은 개항 이후 증가하는 부산 거주 일본인들을 치료하고, 이와 더불어 조선인들에 대한 치료 행위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우위를 선전하고 식민 통치를 안정화 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변천]
1877년 2월 부산에 설립된 일본제생병원(日本濟生病院)은 최초 일본 해군성 소관으로 운영되다가, 1883년 4월 다시 일본 육군성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1881년 ‘거류지 편성 규칙’이 공포되고 거류민 자치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일본인 의사가 개업할 정도로 부산의 상황은 달라졌다. 따라서 일본 외무성은 부산에서 관립 병원이 없어도 거류민들에 의해 병원이 경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885년 4월 30일부로 제생의원의 폐지를 공포하였다.

이에 부산의 일본인들은 자체적으로 경비를 모아 공동으로 운영하는 부산일본공립병원(釜山日本共立病院)을 10월 1일 공식적으로 개원하게 되었다. 다시 1893년 9월 1일 ‘거류지 편제 규칙’이 개편되자 병원 명칭 또한 공립병원(公立病院)으로 변경되어, 1895년 청일 전쟁 시기에는 병참 병원으로도 운영되었다. 1908년에는 부산거류민단립병원(釜山居留民團立病院)으로 다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제 강점기로 들어와 1914년 지방 제도의 제정에 따라 부제(府制)가 실시되게 되었고, 이에 부산민단립병원은 부산부의 소관으로 이관되어 부산부립병원으로 개칭되었다.

명칭의 변경과 함께 병원의 위치도 자주 바뀌었다. 최초 설립된 일본제생병원은 개항 이전부터 존재하던 초량 왜관의 부속 건물 중 일대관옥(一代官屋)에 소재하였다. 현재 위치는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1가 우리은행 맞은편이다. 그 뒤 1880년에는 변천정 3정목으로 이전하였는데, 현재의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2번지로 로얄 호텔 자리이다. 이후 부산부의 시역 및 인구의 확대와 더불어 병원의 확장 이전이 결정되었고 1934년 이전을 위한 공사를 진행하여 1936년 곡정 1정목으로 옮겼다. 현재 부산대학교병원이 있는 자리이다. 이때 개항 이후 콜레라 예방을 위해 1879년 설립된 부산피병원(釜山避病院)의 후신인 부산순치병원(釜山順治病院)과 합쳐 운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산부립병원의 전신인 일본제생병원 시기 주요한 활동은 종두 시술과 콜레라 예방 등을 들 수 있다. 한반도에서 시행된 최초의 종두 시술 규정이 부산의 제생병원에서 제정되었으며 당시 한반도에도 널리 알려졌다. 지석영(池錫永) 또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1879년 10월 부산으로 내려와 제생의원 병원장 호총적재(戶塚積齋)로부터 종두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았다. 지석영은 70여 일 동안 종두법을 배운 후 두묘(痘苗) 3병과 종두침(種痘針) 2개를 얻어 충주의 처가에 들러 40여 명의 아이들에게 종두를 시술하는 한편 귀경한 후 스스로 우두국을 세우고 공개적으로 종두를 보급하는 등 종두법의 도입과 보급에 기여하였다.

제생의원은 종두 시술뿐만 아니라 콜레라에 감염된 환자의 치료와 예방을 위한 소독 등 방역 활동도 전개하였다. 당시의 한의학은 전혀 새로운 감염병인 콜레라에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제생의원의 콜레라 치료와 예방을 위한 방역 활동은 조선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더불어 현대식 설비 및 약품을 보유하고 외과 수술 등 근대적 의료 시술을 실시하여 일본의 우위 또한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인들에 의해 전개된 의료 행위는 조선인들에게는 차별적이었다. 1904년 공립병원 진료비는 초진일 경우 일본인 1엔, 조선인 2엔 이상이었으며 왕진일 경우 일본인 30전, 조선인 3엔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부산부 협의회와 부산부회 회의석상에서 조선인 의원들이 몇 차례 주장하였지만 끝내 실행되지 못했던 조선인 직원의 설치는 일제의 의료 행위 자체가 일본인을 위한 의료 행위일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결국 해방과 더불어 부산부립병원은 부산시립병원으로 전환되어 한국인들을 위한 의료 시설로 재탄생하였다. 현재도 부산대학교병원으로 그 역사성을 이어가고 있다.

[현황]
부산부립병원의 현황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부산거류민단립병원이었던 1912년 당시 조직으로는 내과·외과·부인과·안과·이비인후과·소아과 및 경리부를 두었고, 설비로는 수술실 7·약국 2·병실 34·사무실 4·기타 각종 20여 개의 방을 보유하고 있었다. 입원료의 경우 1등은 1엔, 2등은 75전, 3등은 50전이었으며 진료 환자 수는 그 이전인 1910년의 예이지만 외래 환자 8,565명, 입원 환자 419명이었다.

1934년의 경우 1만 220㎡[3,097평], 건물 3,069㎡[930평], 병실 55실, 수용력 87명이었으며 직원으로 원장 이하 각 과장, 의원 8명, 약국장 1명, 약제원 2명, 서무과장 1명, 서기 2명, 간호 부장 1명, 간호부 22명, 고원 6명이었다. 이후 1936년 신축된 병원은 부지 2만 3727㎡[7,190평], 건평 4,818㎡[1,460평]으로 평상시 보통 환자 100명, 감염병 환자 7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계획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부립병원은 의료와 위생을 문명화의 척도로 삼아 식민지를 경영하였던 일제의 정책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향토사가 및 관련 분야 연구자에게 의미 있는 연구의 대상이 된다.

2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집필항목 검색 닫기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참고문헌 검색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