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를 노래한 고전 문학

대표시청각
button
관련항목 페이징
  • URL Copy
  • twitter
  • facebook
항목 ID GC04210043
한자 東萊-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Dongna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집필자 권정원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고려 후기 - 「입동래견객사장려이상박군언상전군시소구탄식양구인부일편봉정(入東萊見客舍壯麗異常朴君言嘗典郡時所構歎息良久因賦一篇奉呈)」
    특기 사항 시기/일시 고려 후기 - 「동래읍성기(東萊邑城記)」
    특기 사항 시기/일시 고려 후기 - 「동래적취정(東萊積翠亭)」
    특기 사항 시기/일시 고려 후기 - 「동래잡시(東萊雜詩)」
    특기 사항 시기/일시 고려 후기 - 「동래객관(東萊客館)」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전기 - 「정원루기(靖遠樓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63년연표보기 - 「화동래정원루(和東萊靖遠樓)」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3년연표보기 - 「동래현령설전연(東萊縣令設餞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40년연표보기 - 「초입동래성(初入東萊城)」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0년 4월[조선 후기]연표보기 - 「초삼일입동래관(初三日入東萊館)」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중기 - 「차판상운영정원루(次板上韻詠靖遠樓)」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제동헌벽상(題東軒壁上)」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8년 - 「차두봉학사제적취헌운. 적취헌구재객관후금작폐허선위사오이신관동헌인위적취고편내변지(次斗峯學士題積翠軒韻. 積翠軒舊在客館後今作廢墟宣慰使誤以新館東軒認爲積翠故篇內辨之)」
    특기 사항 시기/일시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11년연표보기 - 「정원루(靖遠樓)」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36년연표보기 - 「정원루(靖遠樓)」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읍승정(揖升亭)」
    관련 유적 동래읍성 -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복산동, 명륜동 일대의 마아산과 학산 일대
    관련 유적 동래읍성 남문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일대
    관련 장소 동래읍성 동문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85번길 일대
    관련 유적 동래부 객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일대
    관련 유적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일대지도보기
    관련 유적 정원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일대
    관련 유적 적취정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로 일대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 사이에 부산의 동래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 문학 작품.

[개설]
‘동래’는 동쪽의 봉래산(蓬萊山)이라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아름다운 고장으로 여겨졌다. 동래는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많은 시인 묵객이 드나들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국방의 요충지이며, 통신사의 행로로서 중앙의 관료들이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동래에는 동래부 객관(東萊府客館)과 동헌(東軒)이 있던 곳이기에 이곳에 머물면서 지어진 작품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려 시대 정포(鄭誧)[1309~1345] 의 「동래잡시(東萊雜詩)」 10수와 조선 시대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내산록(萊山綠)』을 꼽을 수 있다.

정포의 「동래잡시」는 부산 지역을 내용으로 하는 최초의 연작시로, 동래 주변의 풍경을 읊은 작품이다. 『내산록』은 이안눌이 동래 부사로 재임하던 시절의 시를 엮은 것으로 213수로 되어 있다. 이밖에도 동래를 노래한 고전 문학 작품으로는 신정(申晸)[1628∼1687]의 『내산록』에 시 144수를 포함[한시 총 500수 수록]하여 동래 소재 정자에 대한 기문이나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 등 산문 10여 편이 남아 있다.

[동래를 노래한 한시]
조선 시대 동래부(東萊府)는 지금의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낙동강 서쪽을 제외한 지역으로 그 범위가 대단히 넓다. 현재의 동래구 지역으로 범위를 좁힌다 하더라도 ‘동래’를 노래한 한시의 대상은 매우 다양하고 양적으로도 방대하다. 그중 작품의 수가 비교적 현저한 작가들을 선별하여 동래 지역 관련 한시의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려 시대: 안축(安軸)[1287~1348]의 「적취정(積翠亭)」 1수, 이곡(李穀)[1298~1351]의 「차정중부동래(次鄭仲父東萊)」 10수, 정포의 「동래잡시(東萊雜詩)」 10수, 정추(鄭樞)[1333~1382]의 「동래회고(東萊懷古)」 등 6수가 있다.

- 조선 전기: 최항(崔恒)[1409~1474]의 「제동래객사(題東萊客舍)」 1수, 강혼(姜渾)[1464~1519]의 「동래역환루(東萊驛還樓)」 1수, 김안국(金安國)[1478∼1543]의 「동래향교(東萊鄕校)」 1수, 정사룡(鄭士龍)[1491∼1570]의 「초입동래성(初入東萊城)」 등 6수가 있다.

- 조선 후기: 이안눌 『내산록』의 213수, 이춘원(李春園)[1571~1634]의 「내주잡영(萊州雜詠)」 17수, 신정 『내산록』의 144수, 이민구(李敏求)[1589~1670]의 「동래잡영(東萊雜詠)」 20수, 남용익(南龍翼)[1628∼1692]의 「내주가(萊州歌)」등 20수,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봉래관(蓬萊館)」 등 4수, 정지윤(鄭芝潤)[1808~1858]의 「내주촌사(萊州村舍)」 6수, 유현(庾玹)의 「내주즉사(萊州卽事)」 등 5수, 이근오(李覲吾)의 「내산기행(萊山紀行)」 11절 외 5수 등 다수가 있다.

물론 이상의 시문들이 모두 현재의 동래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연작시 중 일부는 동래 이외의 부산의 명승지를 노래한 시가 묶여 있기도 하다. 제목을 중심으로 동래 관련 한시를 모은 것이지만, 이를 통하여 동래를 노래한 한시 작품을 대략적으로 살필 수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대상에 따라 ‘동래읍성(東萊邑城)을 노래한 시’, ‘동래부 객관·동헌을 노래한 시’, ‘동래읍성 안의 누각·정자를 노래한 시’,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노래한 시’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동래읍성을 노래한 시

나그네들이 처음 동래를 접하는 곳이 바로 동래읍성이다. 조선 중기 문인 정사룡은 그의 나이 49세 때인 1540년에 동래 온천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동래로 왔다. 그는 부산의 여러 군데를 구경하고 다닌 듯, 그의 문집에는 부산을 읊은 시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처음 동래성에 들어왔을 때의 느낌을 표현한 시이다.

1)정사룡의 「초입동래성」

등귤청황협로장(橙橘靑黃夾路長)[귤 빛깔 파랗고 노란 오솔길 길게 뻗었고]

연휴파아미경상(連畦䆉稏未經霜)[밭이랑의 일렁이는 벼 아직 서리 맞지 않았네]

비생각답성동로(非生却踏城東路)[평생 성 동쪽 길 밟을 것 아니었는데]

괴살추광로경광(愧殺麤狂老更狂)[부끄럽구나 거칠고 미친 성질 늙어서도 미쳤네]

정사룡의 눈에 비친 동래의 첫 모습은 동래로 들어서는 거리의 모습이었다. 길가의 귤 빛깔이 파란 것도 있고 노랗게 익은 것도 있고, 벼는 아직 서리를 맞지 않았다고 묘사한 것으로 보았을 때 동래에 온 것은 가을이었던 듯하다. 그러고는 평생 동래 땅을 밟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자연을 좋아하고 풍류를 좋아하는 자신의 거친 성품을 떨치지 못해 나이 50세에 이렇게 동래에 오게 된 것이 부끄럽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진정 자신의 성품을 탓한 것이라 보기 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온 자신의 감정을 보다 강렬하게 보인 것이라 하겠다.

2)정포, 「동래잡시」 중

관사의매오(官舍依梅塢)[관아는 매화 언덕에 의지해 있고]

민거방수미(民居傍水湄)[민가는 물가에 연하여 있네]

순풍유곤곤(淳風猶袞袞)[순풍이 아직도 훨훨 넘치고]

생물거희희(生物擧熙熙)[생물은 모두 화하고 기쁘네]

간객개휴주(看客皆携酒)[손님을 보려고 술 들고 오는데]

위유총희시(爲儒摠喜詩)[선비라곤 모두 시를 즐기네]

심련선경호(心憐仙境好)[이 선경을 내사 사랑하노니]

막견세인지(莫遣世人知)[함부로 세인에게 알리지 마소]

이 시는 동래읍성 안, 동래의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첫째 구절에서 작자는 관아가 있는 곳을 매화가 피어 있는 마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동헌이 위치한 곳은 도화동(桃花洞)이라고 불리던 동네로, 옛날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정포는 복숭아꽃이 가지는 요염함을 선비의 풍모를 표현할 수 있는 매화로 대치하여 꽃이 핀 마을에 파묻힌 동헌의 풍광을 그린 것이다. 둘째 구절에서는 동래 지역에 드문드문 앉아 있는 민가의 모습을 물을 가까이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 또한 동래성 주변을 흐르고 있는 온천천의 물줄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는 조용한 동래 지역의 민가를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셋째에서 여섯째까지의 구절에서 작자는 이렇듯 아름답고, 소박하면서도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동래 사람들의 순박한 풍속과 인정 많은 행동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마치 이 아름다운 풍경과 소박한 풍속을 갖춘 신성의 세계를 혼자만 차지하려는 듯, 제발 바깥사람들에게 알리지 마시오라고 부탁하는 표현으로 시를 맺고 있다.

2. 동래부 객관·동헌을 노래한 시

동래부 객관은 임무 수행을 위해 온 관료들이 머물렀던 장소로, 객관에서 머물면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시로 남겼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객사는 1612년(광해군 4) 성진선(成晋善)이 건축한 봉래관(蓬萊館)이다. 그러나 동래부 객사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고려 시대에 이미 건축되었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 는 1202년 경상도 일대를 유람했는데, 이 시기 지은 “동래에 들어와서 객사를 보았더니 웅장하고 아름다워 보통 것과는 달랐다. 박군이 말하기를 ‘제가 전에 군을 맡고 있을 때 지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감탄하면서 한참을 있다가 시 한 편을 지어 받들어 올렸다.” 「입동래견객사장려이상박군언상전군시소구탄식양구인부일편봉정[入東萊見客舍壯麗異常朴君言嘗典郡時所構歎息良久因賦一篇奉呈]」이라는 시를 통하여, 당시의 객관이 무척 웅장하고 아름다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고려 후기 성사홍(成士弘)이 지은 「동래객관(東萊客館)」이 있는데, 이 시는 객관에 대한 묘사보다는 동래가 주는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즉 아버지가 동래 현령으로 부임하던 때 자신은 갓난아이였는데, 어른이 되어 다시 온 동래는 마치 고향과 같고, 객관은 마치 고향집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묘사하고 있다.

조선 시대 성현(成俔)[1439∼1504]도 「동래현령설전연(東萊縣令設餞宴)」을 남겼는데, 이 시는 동래의 현령이 순행하는 관찰사에게 베풀어 주는 잔치 자리에 대하여 읊은 것으로 평화로운 풍류가 넘치고 있다. 실제 동래부 객관에 머물면서 지은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1)김성일(金誠一), 「초삼일입동래관(初三日入東萊館)」

우정차석진(郵亭此夕盡)[역에 자기는 이 밤이 마지막이요]

익로명조장(鷁路明朝長)[내일 아침부터는 뱃길이 머네]

역리배인거(驛吏背人去)[역리는 하직하여 가고]

고사영객망(篙師迎客忙)[뱃사공은 손님 영접하기 바쁘네]

비문송풍백(飛文訟風伯)[제문 지어 바람신을 달래고]

거주작룡왕(擧酒酌龍王)[술잔 들어 용왕에게 드리네]

아시삼한사(我是三韓使)[나는 삼한의 사신이니]

무령구모광(無令颶母狂)[태풍이 날뛰지 말게 하소서]

김성일[1538~1593]이 1590년(선조 23)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될 때인 1590년 음력 4월에 지은 것이다. 이날 일기에 그는, “4월 3일, 동래관(東萊館)에 들어갔다. 동쪽 루(樓)에서 저녁에 등불을 밝히고 전별(餞別) 자리를 마련했다. 동래에 머무르면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이때 오언 율시 한 수를 지었다.”고 했는데, 이때 지은 시가 위의 시이다.

이 시에서는 동래의 경치나 동래관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고, 다만 육지에서 여행을 담당했던 역리들이 떠나고 뱃사공들이 자신을 영접하는 모습을 보며 초조함을 느껴서 제문을 지어 바람의 신인 풍백(風伯)에게 제사 지내고, 술잔을 들어 용왕에게 바친다고 표현하여 뱃길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만을 표현하고 있다.

2)이안눌, 「제동헌벽상(題東軒壁上)」

동헌은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동래의 중심이었다. 동헌을 노래한 시 중 부사를 지낸 이안눌동래부 동헌에서 지어 벽에다 걸었던 「제동헌벽상」이라는 시가 대표작이라 하겠다.

만초소삼고곽문(蔓草蕭森古郭門)[덩굴풀 우거진 옛 성문]

신잔려정단퇴원(燼殘閭井但頹垣)[불타버린 마을 무너진 담뿐이로구나]

총사유귀풍연암(叢祠有鬼風煙暗)[숲 속 사당 귀신 있어 바람 불고 안개 가렸고]

해시무인조작훤(痎市無人鳥雀喧)[학질 걸린 저자 사람 없고 참새만 찍찍]

성저폐호퇴백골(城底廢壕堆白骨)[성 아래 무너진 해자엔 쌓였느니 흰 뼈요]

우중한린조황혼(雨中寒燐照黃昏)[빗속에 섬뜩한 도깨비불 황혼에 번뜩이네]

상심인문룡사세(傷心忍問龍蛇歲)[마음 상해 억지로 영웅 싸우던 때 물었더니]

유로상간불감언(遺老相看不敢言)[살아남은 노인들 서로 보며 말하려 하지 않네]

이안눌이 동래 부사로 왔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이 되지 않은 때로, 아직까지 성도 성문도 복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이안눌동래부 동헌에서 바라다 본 동래의 모습을 무너져 덩굴풀만 우거진 황량한 모습이며, 민가도 불에 타버려 앙상하게 담만 남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3. 동래읍성 안의 누각·정자를 노래한 시

동래에는 지금은 비록 사라져 없지만 동래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 여러 누각과 정자가 있었다. 정원루(靖遠樓), 적취정(積翠亭), 읍승정(揖升亭) 등이 대표적이다.

정원루동래부 동헌에서 가장 가까운 정자로서 동헌과 객관의 북쪽에 있었던 누각이다. 정원루는 ‘남쪽 먼 곳[遠]에 있는 일본을 다스린다[靖]’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 공이 순절하였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원루를 노래한 한시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화동래정원루(和東萊靖遠樓)」, 김륵(金玏)[1540~1616]의 「차판상운영정원루(次板上韻詠靖遠樓)」, 이정신(李正臣)[1660∼1727]의 「정원루(靖遠樓)」, 오명서(吳命瑞)[1688~1740]의 「정원루(靖遠樓)」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동래부 객관 뒤편에 적취정 혹은 적취헌(積翠軒)이라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적취정을 노래한 한시로는 이안눌의 「차두봉학사제적취헌운적취헌구재객관후금작폐허선위사오이신관동헌인위적취고편내변지(次斗峯學士題積翠軒韻積翠軒舊在客館後今作廢墟宣慰使誤以新館東軒認爲積翠故篇內辨之)」와 안축의 「동래적취정(東萊積翠亭)」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동래읍성 서쪽 성 안에 읍승정(揖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박내정(朴乃貞)의 「읍승정(揖升亭)」이라는 시가 남아 있다.

4.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노래한 시

동래는 임진왜란 때 왜병과 처음 맞서 싸운 전투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배경으로서 동래를 노래한 시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중 임란으로 인한 동래 지역의 참상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은 이안눌의 「4월 15일(四月十五日)」이다.

평명가가곡(平明家家哭)[이른 아침 집집마다 곡소리]

천지변소슬(天地變簫瑟)[천지가 스산하게 변하여]

처풍진림목(凄風振林木)[처량한 바람 숲을 흔드네]

경괴문로리(驚怪問老吏)[깜짝 놀라 늙은 아전에게 물었네]

곡성하참달(哭聲何慘怛)[곡소리 어찌 그리 애달프냐고]

임진해적지(壬辰海賊至)[임진년 바다 건너 도적떼 와서]

시일성함몰(是日城陷沒)[이날 성이 함락되었지요]

유시송사군(惟時宋使君)[그 당시 송 부사께서는]

견벽수충절(堅壁守忠節)[성문 닫고 충절을 지켰지요]

합경구입성(闔境驅入城)[온 고을 사람들 성에 몰아넣어]

동시화위혈(同時化爲血)[동시에 피로 변했지요]

투신적시저(投身積屍底)[시신 더미 아래 몸을 던져]

천백유일이(千百遺一二)[백 명 천 명에 한 둘이 살았습니다]

소이봉시일(所以逢是日)[그래서 이 날이 되면]

설전곡기사(設奠哭其死)[제물 차려 죽은 이를 곡한답니다]

부혹곡기자(父或哭其子)[아버지가 그 아들을 곡하고]

자혹곡기부(子或哭其父)[아들이 그 아버지를 곡하며]

조혹곡기손(祖或哭其孫)[혹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곡하고]

손혹곡기조(孫或哭其祖)[혹은 손자가 할아버지를 곡하며]

역유모곡녀(亦有母哭女)[또 어미가 딸을 곡하고]

역유녀곡모(亦有女哭母)[또 딸이 어미를 곡하며]

역유부곡부(亦有婦哭夫)[아내가 남편을 곡하기도 하고]

역유부곡부(亦有夫哭婦)[남편이 아내를 곡하기도 하며]

형제여자매(兄弟與姊妹)[형, 동생, 언니, 동생 등]

유생개곡지(有生皆哭之)[살아 있다면 모두 곡을 한답니다]

축액청미종(蹙額聽未終)[이마를 찡그리고 듣다가 다 듣지 못하고]

체사홀교이(涕泗忽交頤)[눈물이 갑자기 주르륵 흐르네]

이내전치사(吏乃前致詞)[아전이 나서서 하는 말씀]

유곡유미비(有哭猶未悲)[곡하는 이 그래도 슬프지 않소]

기다백인하(幾多白刃下)[시퍼런 칼날 아래 모두 죽어서]

거족무곡자(擧族無哭者)[곡할 사람 없는 이가 대부분이라오]

4월 15일은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다. 그래서 이 날은 임진란 전투 중에 돌아가신 의사(義士)들을 제사 지낸다. 작자 이안눌이 동래 부사로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던 시기다. 그러므로 아직 임진왜란의 피해가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다. 백성들은 이제야 겨우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여유라도 찾을 수 있었다. 이렇듯 이 시는 임진왜란 직후 동래 전역의 백성들이 거의 죽다시피 지낸 4월 15일의 풍경을 잘 그려 내고 있다.

[동래를 노래한 산문]
동래를 노래한 산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동래의 승경과 풍물에 대한 기록과 동래 지역의 임진왜란에 대한 체험 기록이 그것이다.

1. 동래 승경·풍물에 대한 기록

동래 지역의 승경과 풍물을 읊은 산문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에는 으레 누각이나 정자가 있기 마련이고, 누각과 정자가 있으면 이에 대한 기문이나 유기가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고려 전기의 문인 김정(金精)[?∼1368]이 동래부 객관에 있던 정자인 적취정을 대상으로 지은 「적취정기(積翠亭記)」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전하는 기문(記文)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은 고려 후기의 문인인 이첨(李詹)[1345~1405]이 지은 「동래읍성기(東萊邑城記)」이다. 이 글은 변방 수호를 위한 읍성을 짓게 된 사유와 경과를 기록한 읍성기이면서도 동래 지역의 아름다운 승경을 말하고 있다.

동래부 동헌에 있던 정원루라는 정자를 읊은 기문으로 조선 전기의 문인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정원루기(靖遠樓記)」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동래 부사였던 한배하(韓配夏)[1650~1722]의 「정원루기」가 남아 있다. 신숙주의 글은 정원루가 세워진 경위와 연대를 상세히 알려 준다.

2. 동래 지역 임진왜란의 체험 기록

임진왜란의 체험을 기록한 산문은 8편 가량 남아 있다. 부산은 임진왜란 때에 왜병과 처음 맞서 싸운 곳이고,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전투의 현장이었다.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송상현과 동래읍성 주민을 기리기 위한 것이 송공단(宋公壇)충렬사, 안락 서원 등인데, 이를 세우는 과정에서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동래남문비기(東萊南門碑記)」와 「송부사행장(宋府使行狀)」, 「송부사신도비명(宋府使神道碑銘)」, 신흠(申欽)[1566∼1628]의 「송동래전(宋東萊傳)」, 유계(兪棨)[1607∼1664]의 「사우개건기(祠宇改建記)」, 권이진(權以鎭)[1668~1734]의 「화기(畵記)」 등이 이루어졌다.

「동래남문비기」와 「송부사행장」, 「송부사신도비명」, 「송동래전」 등은 송상현에 대한 기록이고, 「화기」는 동래부 전투 상황을 표현한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를 설명한 글이다. 이밖에 동래성 전투에서 겨우 살아나 양부하(梁敷河)가 일본에 사로잡혀갔다가 돌아온 사연을 기록한 임상원(任相元)[1638∼1697]의 「동래양부하전(東萊梁敷河傳)」이 있고,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 사로잡혀 갔다가 쇄환된 동래 사창과 그 어미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허목(許穆)[1595∼1682]의 「동래구(東萊嫗)」가 남아 있다.

[의의 및 평가]
동래는 옛 부산의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지리적으로 국방의 요충지이며, 통신사의 행로로서 부산을 찾는 중앙 관료는 물론 시인 묵객들이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었다. 따라서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작품과 임진왜란의 참상을 노래한 작품과 타국으로 떠나는 이의 설렘과 그리움이 담긴 작품 등 수많은 작품의 창작 배경이 된 곳이었다. 동래를 노래한 고전 문학 속에는 옛 동래의 모습이 뚜렷이 남아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간 동래 백성들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따라서 이들 작품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옛 부산 동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임진왜란의 참상과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한다.

0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집필항목 검색 닫기
향토문화전자대전 로고 참고문헌 검색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