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포를 노래한 고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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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0044
한자 豆毛浦-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Dumo-po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권정원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3년연표보기 - 「왕부산포선위류구사신시일대우(往釜山浦宣慰琉球使臣是日大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류부산만점(留釜山謾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차신종사영왜관운(次申從事詠倭館韻)」
    관련 장소 두모포영, 고관(古館)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일대
[정의]
조선 시대 부산의 수군 진영 두모포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 문학 작품.

[개설]
두모포(豆毛浦)는 원래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일대로, 조선 초기부터 두모포진(豆毛浦鎭)이라는 수군 진영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 1629년(인조 7)에 성을 그대로 두고 두모포영(豆毛浦營)을 부산시 수정동의 부산성(釜山城)으로 옮기면서 그 이름까지도 그대로 가져가서 부산성에 있는 수정동의 진영을 두모포 진영이라 하였다. 그리고 기장현의 두모포란 지명은 두호로 개칭하였고, 두모포진은 폐지하였다. 이후 부산성이 있던 수정동 일대를 두모포라 불렀다.

그런데 수정동은 고관(古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왜냐하면 초량 왜관이 신설될 때까지 이곳에 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모포 왜관부산포에 설립한 것이라 부산포 왜관(釜山浦倭館)이라고도 하였다. 두모포 역시 부산포(富山浦), 부산포(釜山浦) 등의 다양한 지명으로 불렸다. 따라서 두모포를 노래한 고전 문학은 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일대를 노래한 것으로, 이들 작품 역시 부산포두모포, 두모포 왜관부산포 왜관 주변의 모습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라 하겠다.

[두모포를 노래한 한시]
두모포를 노래한 한시의 대부분은 두모포 왜관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모습을 읊고 있다. 하지만 고관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1678년 이전에 부산포 왜관을 노래한 시는 곧 두모포 왜관을, 그 이후의 작품은 초량 왜관을 노래한 작품이 된다. 시 제목이나 지명에서 직접 두모포를 언급한 한시보다는 부산(釜山)[혹은 부산(富山)], 또는 부산포, 부산포 왜관두모포 주변 풍경을 노래한 한시가 주요 대상이 다. 두모포 주변의 풍경을 읊은 행명(涬溟) 윤순지(尹順之)[1591~1666]와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의 시를 감상해 보자.

1. 윤순지의 「부산의 여관 점포에 머물면서[留釜山謾占]」

곡란동반하중렴(曲欄東畔下重簾)[굽은 난간 동쪽 가에 겹 주렴이 늘려 있는데]

낙만경풍입화첨(落晩輕風入畫簷)[해 질 녘 가벼운 바람은 그림 같은 처마에 불어오네]

야녀춘장주취병(野女春粧珠翠竝)[시골 아낙 봄 화장하고 비취 구슬 늘어뜨렸고]

객반진미해산겸(客盤珍味海山兼)[나그네를 위한 접시 위엔 산해진미 가득하네]

만선통화수금석(蠻船通貨輸金錫)[왜놈 배 무역하여 보내는 건 쇠와 주석]

연호모생천미염(蜒戶謀生賤米鹽)[도마뱀 같은 집에 아무개는 값싼 쌀과 소금 팔아 살아가네]

가구흡감제승지(佳句恰堪題勝地)[좋은 시구는 좋은 경치 읊기에 꼭 맞은데]

채호나득사강엄(彩毫那得似江淹)[그림붓은 어찌하면 넓은 강을 다 담을 수 있을까].

윤순지가 이 시를 지은 것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때인 1643년(인조 21)이다. 당시는 아직 왜관이 초량 왜관으로 옮기기 전이니, 이 시에서 읊고 있는 것은 두모포 왜관 주변 정경이라 하겠다. 윤순지는 이 시를 부산진성의 누각에 올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부드럽게 이어진 누각의 난간 위로 동쪽 편에는 발을 쳐 놓았다. 그러므로 작자는 발이 펴지지 않은 서쪽 편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의 좌천동 앞바다와 수정동 앞바다로 눈을 옮겨 가다가, 마지막엔 두모포를 바라보며 경치를 읊었다. 시골 아낙네이지만 엷게 봄 화장하고 구슬과 비취로 노리개를 한 모습이 산뜻하고, 내오는 반찬도 산해진미다. 어느덧 통신사로서의 부담감과 부산이라는 변방에 머무르게 된 걱정스러움은 사라지고, 주변 경관을 읊을 만큼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

그런 그의 눈에 일본인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왕래하는 모습이 멀리 비쳤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산물인 쇠나 주석을 가지고 와서 그들이 부족한 쌀과 소금을 사갔다. 그에게는 이런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모습이 마치 도마뱀이 뒤섞인 것처럼 보인다고 표현했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 그는 부산의 경치에 도취되어 그것을 시로 읊고 있는 자신이 부산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재주가 부족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2. 성현의 「부산포 선위관이 유구 사신 전송하는데 이날 큰 비가 내렸네[往釜山浦宣慰琉球使臣是日大雨]」

궤봉윤음하자신(跪捧綸音下紫宸)[무릎 꿇고-사신을 전송하라는- 어명 받들고 대궐에서 내려와]

일호영위원래인(一壺迎慰遠來人)[한 병 술로 멀리 온 사신 맞아 위로하네]

풍도해요미남북(風濤海徼迷南北)[풍파 속에 바다로 다니며 남북을 헤맸으나]

담소당중작주빈(談笑堂中作主賓)[당(堂) 안에선 담소하며 주객의 신분 되었네]

주협춘광훈객면(酒挾春光醺客面)[술과 봄 풍광에 손님 얼굴 거나하게 취했고]

우화은택암천진(雨和恩澤暗天津)[어둑한 하늘 아래 나루엔 은택의 비 내리네]

조제훼복쟁투화(雕題卉服爭投化)[글 지으니 오랑캐 교화되어 다투어 투항하여]

변어연년부동진(邊圉年年不動塵)[변방엔 해마다 전쟁 먼지 일지 않네].

성현은 1493년(성종 24)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이 시의 제목을 보아서 당시 유구(琉球)[현재 오키나와현]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부산포로 왔을 때 왜관에 온 느낌을 읊은 것이다. 성현이 유구 사신을 맞이하던 당시의 왜관은 물론 지금의 수정동 고관 지역, 곧 두모포이다.

1~4구에서는 풍파가 치는 바닷길의 고생을 마다 않고 서로의 교린을 위해 남으로 북으로 왕래하는 사신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비록 한 병의 술일지언정 먼 길 온 손님을 주인 된 입장에서 정성껏 대접하려는 작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봄빛이 포근하게 비치는 왜관의 잔치 자리인 연향청(宴享廳)에서 마주하는 주인과 손님이 서로 마음을 터놓고 한 잔 술을 나누니, 술에도 취할 뿐더러 서로의 마음에도 취하고 있다.

이때 이것을 축복이라도 하듯 가물기 쉬운 봄철 은혜로운 봄비가 내려, 왜관에서 바라보이는 두모포 나루터는 하늘과 맞닿은 듯 희뿌옇게 보인다고, 작자는 유구 사신들과의 만남은 실로 아름다운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산포를 읊은 시는 대단히 많지만 두모포 주변을 읊었는지, 초량 주변을 읊었는지, 구분이 필요하다. 두모포에 있던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간 이후 초량 왜관 주변의 모습과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읊은 것으로는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연작 한시 「초량왜관사(草梁倭館詞)」가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 왜관은 일본 문물이 우리나라로 유입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고, 두모포 왜관은 일본과의 문물 교환의 주요 장소였다. 따라서 두모포를 노래한 고전 문학은 한일 외교 및 무역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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