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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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0312
한자 民主衆報
영어음역 The Minju Jungbo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대청동 3가 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보영,김은진

    [상세정보]

    성격 정기 간행물|신문
    관련인물 석광수|이만용|조병종|조필규|김형두|장수봉|이상복|이소조|김을룡|이갑기
    창간인 이갑기
    발행인 이갑기
    판형 타블로이드판[25.4×37.4㎝]
    창간 시기/일시 1945년 9월 20일연표보기 - 『부산 일보』에서 『민주 중보』로 개칭하여 발행
    폐간|종간 시기/일시 1962년 8월 1일연표보기 - 폐간
    속간 시기/일시 1946년 11월 15일연표보기 - 속간
    속간 시기/일시 1948년 8월 17일연표보기 - 『민주 중보』에서 『민주 신보』로 개칭하여 속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6년 9월 9일 - 미군정의 강제 퇴거 명령으로 이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6년 10월 4일 - 무기 정간 처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7년 3월 25일 - 테러단에 습격당함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8년 6월 16일 - 무기 정간 처분
    제작|간행처 『민주 중보』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구 부산부 안본정 옛 『부산 일보』 사옥]지도보기
    제작|간행처 『민주 중보』 - 부산광역시 중구 에비스 약국 2층[당시 주소]지도보기
    제작|간행처 『민주 신보』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3가 8
[정의]
해방 이후 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발행된 우리말 신문.

[창간 경위]
1941년 『부산 일보(釜山日報)』조선총독부의 일도 일지(一道一紙) 신문 정비 방침에 의해 부산의 『조선 시보(朝鮮時報)』, 마산의 『남선 일보(南鮮日報)』를 통합한 경상남도 지역의 유일한 신문이었다. 그러나 젊은 일본인 사원들이 모두 전쟁에 징집되어 간 상태에서 50여 명의 사원 중 상당수는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인쇄 부문은 거의 한국인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산 일보』에서 해방의 감격을 맞이한 한국인 사원들은 일본인 간부와 헌병들의 요구로 『부산 일보』 발행에 협조하는 한편, 우리 신문 발행을 계획하여, 초량의 협동인쇄소에서 우리말 활자를 구해 9월 1일부터 국문판 『부산 일보』를 발행하였다. 우리말 『부산 일보』를 발행하던 사원들은 9월 17일, 미군 6사단 병력이 부산에 진주해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함께 각 기관을 접수하기 시작하자, 신문사를 접수하고 자치적인 운영 위원회를 만들어 9월 20일부터 제호를 『민주 중보(民主衆報)』로 바꾸어 발행하였다.

[형태]
판형은 타블로이드판[25.4×37.4㎝]이며 발행 면수는 2면이다.

[구성/내용]
『민주 중보』는 창간부터 중립적 논조를 표방하였다. 1면에는 중앙 뉴스와 외신 등을 싣고 2면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지방 뉴스를 실었는데, 새로운 사회가 전개되면서 국문 신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으로 창간 이후 1년 이내에 부산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성장하였다.

[변천과 현황]
『민주 중보』는 안본정(岸本町)[현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일대]에 있던 구 『부산 일보』 사옥에서 창간하였다. 운영 위원회는 통칭 7인 위원회라 불리기도 하였다. 위원장은 일문지(日文紙) 『부산 일보』의 유일한 간부였던 이갑기(李甲基)로 창간과 발행을 맡았다. 초기 『민주 중보』 제작에 참여한 멤버들은 석광수(石光守), 이만용(李萬鎔), 조병종(曺秉宗), 조필규(趙必奎), 김형두(金炯斗), 장수봉(張壽奉) 등과 판매의 이상복(李尙馥), 공무의 이소조(李小祚), 김을룡 등이었다.

『부산 일보』 사옥에서 발행하던 『민주 중보』는 발행 부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던 1946년 9월 9일, 갑자기 미군정 적산(敵産) 관리 당국으로부터 24시간 내 퇴거 명령을 받아 9월 10일 새로 창간된 『부산 일보』에 사옥과 시설을 내어 주고 인근의 구 에비스 약국 2층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민주 중보』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퇴거 명령의 이유는 군정 당국이 『민주 중보』의 논조를 좌경적이라고 보고 구 『부산 일보』 관리권을 전혀 연고가 없는 박수형(朴洙衡) 등에게 넘겨준 데 있었다.

『민주 중보』는 구 『부산 일보』 사옥에서 퇴거당한 직후인 1946년 10월 4일에 대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10월 폭동 사건을 호외로 보도한 것을 이유로 정간 처분을 당하고, 발행인 이갑기가 구속되고 편집국장 김형두가 책임을 지고 퇴사하는 등의 탄압을 받았다. 때를 같이 하여 테러단의 습격을 받아 시설 파괴로 신문 발행이 일시 중단되는 화를 입었다. 이러한 파란으로 『민주 중보』는 군정 경상남도 보건국장을 지낸 박기출(朴己出)을 사장으로 영입하고 이만용이 주간 겸 편집국장을 맡는 등의 개편으로 복간하였으나, 이후에도 군정의 간섭은 누그러지지 않아 지면이 종전처럼 활기를 띠지 못하였다. 그러나 독자들의 지지는 여전하여 발행 부수는 부산 1위, 전국 3, 4위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이런 가운데 1947년 3월 25일 또 테러를 당하고,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6월 16일 다시 기사 문제로 무기 정간 처분을 받고, 편집국장 이만용 등 네 명이 송청(送廳)되는 수난을 당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8월 17일 항일 투사 최천택(崔天澤)을 사장에 영입하고 제호를 『민주 신보(民主新報)』로 바꾸고, 주간 이만용, 편집국장 강재은(姜在殷)의 진용으로 개편하여 복간하게 되었다. 이후 6·25 전쟁 동안 『동아 일보』 등 서울의 중앙지들이 피난해 온 여건 하에서 발행 부수 8만 부를 기록하는 전국 최대의 신문으로 발전하였다.

1953년 부산역 앞 대화재로 『중앙 일보』[현 『중앙 일보』와 다름,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3가 8번지] 사옥 2층으로 이전하였다. 1956년 8월 2일에는 『민주 신보』 박권흠 기자가 기사에 불만을 품은 자유당 경남도당 김태홍 문화부 차장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62년 5·16 쿠데타 이후 1962년 7월 31일 언론 세칙이 발표되고 바로 다음날인 1962년 8월 1일자 석간을 마지막으로 자진 폐간하였다.

[의의와 평가]
『민주 중보』는 1945년 8월 31일 광주에서 『전남 일보(全南日報)』가 창간된 것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빠른 우리말 신문이었다. 국문 활자의 상황이 나은 서울에서 처음 창간된 신문이 1945년 9월 8일 나온 『조선 인민보(朝鮮人民報)』인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부산 언론계에서 저명 언론인의 거의가 『민주 중보』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부산 언론사에서 평가받을 만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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