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 해방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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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0374
한자 人民解放報
영어의미역 Inmin Haebangbo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진

    [상세정보]

    성격 신문
    관련인물 윤일|박승도|강대홍
    창간인 노백용
    발행인 노백용
    판형 타블로이드판[25.4×37.4㎝]
    창간 시기/일시 1945년 10월 8일연표보기 - 창간
    정간 시기 1945년 12월 9일연표보기 - 방화로 인한 정간
    1946년 9월 29일 - 정간
    폐간|종간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무기정간 처분 후 폐간
    속간 시기/일시 1945년 12월 24일연표보기 - 속간
    속간 시기/일시 1946년 10월 30일연표보기 - 속간
    제작|간행처 『인민 해방보』 간행처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정의]
해방 후 부산 지역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한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좌익계 신문.

[창간 경위]
노백용[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지부 위원장, 전국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역임]을 중심으로 윤일, 박승도, 강대홍 등이 1945년 10월 8일 창간한 좌익계 신문이다. 발행인은 노백용으로 되어 있으나, 운영비는 일본에서 공사장 현장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는 박승도가 실질적으로 댄 것으로 알려졌다.

[형태]
타블로이드판[25.4×37.4㎝] 두 면으로 발행되었다.

[구성/내용]
1면은 ‘서울 전화 합동’, ‘서울발 조선’ 등의 정치 기사를 주로 싣고, 2면은 사회면으로 지방 기사를 실었다. 미군정 시기 부산 언론의 이념 성향은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인민 해방보(人民解放報)』의 이념 성향은 극좌로 평가된다.

[변천과 현황]
창간 당시 사옥의 위치는 불확실하며, 같은 해 12월 9일 괴한에 의한 방화로 사옥이 불타 사옥을 중앙동 3가 8번지[일본인이 경영하던 서점 박문당의 옛 자리]로 옮겨 속간되었다. 인쇄 공장은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에 있다가 후에 중구 대청동으로 이전하였다.

1946년 4월 9일 경상남도 경찰부는 부산의 좌익 계열 각 정당과 사회단체와 언론에 대한 검거와 압수를 단행하였는데 이때 『민주 중보』, 『대중 신문』, 『신한 일보』 등과 함께 『인민 해방보』가 대상이 되었다. 이 조치에 대해 당국은 “각 신문사가 미군정을 신임치 않으며 방해하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 파괴적 기록을 수사하기 위해서 검색을 한 결과 불법 행위가 있었음이 발각된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1946년 11월 30일자 『동아 일보』 2면에 따르면 『인민 해방보』조선공산당 경남위원회의 발표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것이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령 제2호를 위반해 1946년 9월 29일 1개월간 정간되었고 10월 30일 속간되었다. 같은 해 11월 16일 조선공산당 경남위원회에서 발표한 「남조선 사태에 대하야 동포 제위에게 고함」이라는 기사로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다. 1946년 12월 1일자 『경향 신문』 3면에 『인민 해방보』 정간에 대한 이유가 공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누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선동적인 기사를 게제하고, 편집국장과 주필이 10월 ‘대구 폭동 사건’에 관련되어 피신 중이고, 편집국장 대리는 맥아더 사령부 포고령 제2호위반으로 조사 중이어서 정간 처분한다.”라는 것이다. 이후 거듭되는 군정의 제재를 받는 가운데 1947년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무기 정간 처분을 받은 이후 폐간되었다.

[의의와 평가]
『인민 해방보』는 전위적(前衛的) 좌익지로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선민주청년연맹, 조선부녀총동맹 등의 조직을 타고 상당히 많은 부수가 보급되어 영향력이 컸다. 해방 이후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조각 명단(組閣名單)을 부산에서 처음 보도한 것도 『인민 해방보』였다(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김구, 김일성, 여운형, 이승만 등으로 구성된 동진공화국이 들어선다는 유언비어).

『인민 해방보』는 1945년 연말 신탁 통치 문제가 돌출하였을 때 1946년 1월 2일자 연두사에서 신탁 통치 절대 반대를 주장하였으나 조선공산당이 ‘3상 결정 지지’의 방향을 굳히자 논조가 찬탁으로 선회하였다. 이런 논조로 수차에 걸쳐 우익 단체의 테러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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