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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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0383
한자 朝鮮新報
영어의미역 The Joseon Sinbo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보영

    [상세정보]

    성격 신문
    관련인물 스즈키 다다요시|오이시 도쿠오
    창간인 오이시 도쿠오
    발행인 오이시 도쿠오
    창간 시기/일시 1881년 12월 10일연표보기 - 창간
    소장처 동경대학교 - 일본 도쿄
    제작|간행처 부산상법회의소 - 부산광역시
[정의]
근대 부산에서 일본인이 발행한 신문.

[창간 경위]
『조선 신보(朝鮮新報)』는 부산 지역에 진출한 일본 상인들의 단체인 부산상법회의소가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만든 신문이다. 부산에서 일본 상인들에 대한 악명이 높아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산상법회의소가 1879년(고종 16) 8월에 설립되었고, 부산상법회의소는 심화된 반일 감정을 다스리고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기관지로 『조선 신보』를 1881년(고종 18) 12월 10일 창간하였다. 『조선 신보』의 편집인 및 인쇄인은 오이시 도쿠오이며 판매 책임을 맡은 사람은 스즈키 다다요시[鈴木忠義]로 되어 있다. 이후의 변천 과정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형태]
창간호는 한 장짜리였으나 두 달 후에 나온 제2호는 뉴스 북의 형태로 바뀌었으며 발행 간격이 순간(旬刊)으로 정착되었다. 현존하는 제5호 이후를 보면 표지에는 ‘조선 신보’라는 제호가 나오고 그 우측에는 일본의 메이지[明治] 연호, 좌측에는 조선력, 그 밑에는 발행 호수가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맨 좌측에는 ‘재부산항 상법회의소’라는 발행소의 명칭이 직인과 함께 기재되어 있다.

[구성/내용]
『조선 신보』는 기본적으로 경제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가 시세나 시장 정보 등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일본인들의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는 내용들도 실렸다. 지면의 편집은 기사를 항목별로 분류하여 게재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기사의 분류 체계를 순서대로 보면 영사관의 공지 사항 등을 다루는 ‘영사관 녹사’, 오늘날의 사설에 해당하는 ‘조선 신보’, 사회면에 해당하는 ‘잡보’, 부산의 경제 동향을 다루는 ‘부산 상황(釜山商況)’, 당시의 또 다른 개항장 원산의 소식을 다루는 ‘원산 통신’, 독자 투고인 ‘기서(奇書)’, 물가를 알려 주는 ‘물가 표’, ‘광고’와 ‘본국(本局) 광고’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기사의 지면의 양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기사의 양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엘리트 계층을 대상으로 개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사들도 지면에 실렸다. 현존하는 제5호부터 제12호까지를 보면 『조선 신보』의 사용 문자는 한문과 일어이었고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한글이 사용되었다. 이렇게 복합적인 언어를 사용한 이유는 『조선 신보』의 주된 독자층이 일본 상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관리를 비롯한 식자층을 동시에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신보』는 『한성순보』보다 1년 10개월 정도 먼저 창간되었다. 비록 일본에 의한 것이지만 국내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이 발행한 신문이어서 우리 언론 역사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으로 부산 지역의 주민들이 다른 지역보다도 앞서서 근대 신문을 접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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