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미산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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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0906
한자 龍尾山神社
영어의미역 Yongmisan Shirine
이칭/별칭 옥수신사
분야 종교/신종교,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2[중앙동 7가 20-1]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성격 종교 시설[신사]
    설립 시기/일시 1678년연표보기 - 옥수 신사로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멸실
    이전 시기/일시 1934년 - 용두산으로 이전
    개칭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옥수 신사에서 거류지 신사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거류지 신사에서 용미산 신사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19년 - 가등청정 합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8년 경 - 조비나의수 합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8년 - 화재로 소실 후 재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0년 - 일부 수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 기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 낙성식, 천궁제 집행
    최초 설립지 옥수 신사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7가 20-1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용미산 신사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1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중구 용미산에 있었던 신사.

[설립 목적]
신사(神社)란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에서 신령을 모시는 곳, 또는 신령을 부르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의 신도는 일찍이 불교, 유교와 같은 외래 종교와 습합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신앙적 성격을 지닌 종교로 자리 잡았으나,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천황제 근대 국가를 떠받치는 중요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었고, 본국을 넘어 국외 식민지에서까지 통합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각 지역 신사의 제신(祭神)은 이러한 제국의 팽창과 통합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상징적 인물이 선정되었다.

1678년 3월 초량 왜관 설치와 동시에 설립된 용미산 신사(龍尾山神社)의 당초 명칭은 ‘옥수 신사(玉垂神社)[타마다레진자]’로, 그 제신은 무내숙녜(武內宿禰)[다케시우찌 노스쿠네]였다. 그는 일본의 8대 효원(孝元) 천황의 아들이며 신공 황후(神功皇后)와 함께 중애(仲哀) 천황의 죽음을 숨기고 외정(外征)에 나섰던 인물이라 한다.

그 후 1819년 3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을 합사하였고, 메이지[明治] 초년 용두산 중턱[현재의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중간쯤]에 있던 조비나 신사(朝比奈神社)[아사히나진자]가 쇠락하여 그 제신 조비나의수(朝比奈義秀)[아사히나 요시히데]도 합사하였다. 조비나의수는 가마쿠라 전기의 신화적인 무사로, 괴력을 지닌 수영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이 용미산 신사의 제신은 모두 무신(武神)이거나,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서, 이를 통해 한반도 남단 부산에서도 가장 일본과 가까운 곳에 신사를 설치한 목적과 그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1678년 설치된 이래 옥수 신사는 건물 하나의 소사(小祠)로 유지되어 오다가, 1878년 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유지자 보가정팔(保家貞八), 서촌전병위(西村傳兵衛), 고목정태랑(高木政太郞), 진손석위문(秦孫石衛門), 아비류선구랑(阿比留善九郞), 제등만차랑(齊藤萬次郞) 등이 기부금을 모아 새로 2칸의 사당을 조영(造營)하였다. 또 1890년 봄 거류민단비로 일부 수선하였다. 이어서 1894년 ‘거류지 신사(居留地神社)’라고 개칭하였다가, 1899년 2월 ‘용미산 신사’로 확정하였다.

1905년 여름 경신회(敬神會) 회장 시교관일랑(矢橋寬一郞)과 간사 고등승일랑(古藤昇一郞) 등이 용미산 신사를 개조하기로 하고, 거류지 회의를 통해 약 5,500여 원의 기금을 조성하였다. 1907년 3월 기공하여, 이듬해 2월 낙성식과 천궁제(遷宮祭)를 집행하였다. 또 거류민단에서 800여 원을 투자하여 경내 주위에 석담을 쌓았다.

1911년 당시 용미산 신사의 전체 면적은 2,310㎡[700평]으로, 이를 평당 40원으로 계산할 때 시가 2만 8000원에 해당하였다. 경내 시설물들은 신전 13.2㎡[4평], 배전 42.9㎡[13평], 사무소 42.9㎡[13평] 등이었는데, 이 또한 5,500여 원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1911년 당시 용미산 신사 전체의 재산은 3만 500여 원 정도였으며, 신도 수는 2만 5000여 명으로 파악되었다. 1912년에는 신직(神職) 대리 구곡조차랑(龜谷造次郞)이 궁사(宮司)를 맡고 있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정비가 완료된 용미산 신사는 1932년 부산부의 간선 도로 공사로 인해 용미산이 착평되면서 용두산 신사의 동쪽으로 이설되게 되었다. 1934년 3월 새로운 신사 건물이 준공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용두산 신사의 섭사(攝社)[본사에 모신 신과 인연이 깊은 신을 모신 곳]로 기능하였으며, 매년 10월 2일 밤부터 다음날 3일까지 예제(例祭)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현황]
일제 강점기의 신사는 대개 해방과 동시에 철거되었는데, 용미산 신사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었다. 과거 용두산 신사용미산 신사가 위치하였던 용두산은 공원으로 새단장 되어 옛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며, 용미산 신사용두산으로 이전하기 전 위치했던 용미산 신사 터에는 부산부청과 부산시청을 거쳐, 현재 롯데 백화점 광복점이 위치해 있다.

[의의와 평가]
용미산 신사용두산 신사와 함께 일제 강점기 근대 도시 부산의 주요 신사로 기능하였다. 특히 부산은 초량 왜관에서부터 비롯된 오랜 일본인 거류지로서의 역사가 있어, 신도의 역할이 타 도시에 비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용두산 신사는 물론, 용미산 신사에 대해서도 그 정체와 역사적 역할에 대해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식민지 도시 부산의 핵심을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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