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작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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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2914
한자 以後作家展
영어의미역 The Exhibition of Ihoo Artist's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행사/행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양희

    [상세정보]

    행사시기/일시 1968년 4월 14일~1968년 4월 20일
    시작 시기/일시 1968년 4월 14일연표보기 - 개최
    폐지 시기/일시 1968년 4월 20일연표보기 - 폐지
    행사 장소 부산 전시관 - 부산광역시
[정의]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동인인 ‘혁동인’과 ‘습지동인’ 회원들이 모여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결성한 미술 동인 이후작가회의 창립전.

[개설]
습지(濕地)동인은 1965년에 고수길과 김인환, 김청정, 오춘란, 이용길, 이정수가 모여 창립하였다. 창립 선언문을 통해 “…… 자유로운 서식과 호흡과 조형적인 자유를 관심할 따름이고, 인간 존재의 원형을 찾는 자기 확대와 잇닿는 모험과 실험의 자세로 부수고 바르고 깎고 쌓아 올릴 뿐이다”라고 목적을 밝히고 있다.

혁동인은 1963년에 미술계의 전통적인 고정 관념이나 구질서를 거부하면서 내면적인 것, 새로운 것,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고 창조한다는 것을 앞세워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동문인 김종근과 김동규, 김흥규, 김종철, 박만천이 결성하였다. 창립 멤버인 이들은 현재까지도 동인을 이어 오고 있다.

[연원 및 개최 경위]
추상을 추구하며 생긴 ‘습지동인’[1965~1967]과, 처음에는 구상화풍에서 출발하였지만 제3회 전시회 이후 추상화풍으로 변모한 ‘혁동인’은 실험적인 동인을 지향하며 ‘이후작가회’를 만들었다. 이후작가회의 창립전은 1968년 4월 14일부터 그해 4월 20일까지 부산 전시관에서 열렸다.

창립 선언문에서 “1. 우리는 추상 이후(抽象以後)에 기점해서 갖은 실험 정신을 기울인다, 2. 우리는 세계정신에 입각함과 아울러 전통의 바닥에 뿌리를 둔 전위(前衛)와 자세에 투철하려 한다, 3. 우리는 이 운동에 참여하는 개체의 자유로운 의사(意思), 자유로운 표현을 기리고 사랑할 것이다, 4. 우리는 끊임없이 ‘낡고 경화(硬化)됨’을 제거하고 거기에 새로운 활력(活力)을 부여하는 작업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이라고 밝혔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행방을 ‘오늘’, ‘한국’, ‘세계’에 값하는 형태로 나섬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과 괴리된 안일에 잠겨 있기를 거부하고 ‘나 아닌 나’에 머물기를 거부하며, 주어진 현실을 직시해서 밝고 긍정적인 면으로 산출하려 한다”는 구호를 내걸기도 하였다. 부산의 젊은 기수로 자처해 오던 ‘혁동인’과 ‘습지동인’이 화합을 추구하며 이후 작가전을 가졌지만, 제1회 전시회를 가진 후 자발적으로 해산하였다.

[행사 내용]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는 1967년부터 추상 미술의 포화(飽和) 지점을 벗어나려는 일단의 움직임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였다. 무(無), 신전(新展), 오리진에 의한 청년 작가 연립전(靑年作家聯立展)과 와트전이 그것이다. 이들의 작품 특징은 즉물적인 요소가 강한 철판, 스테인리스 파이프, 엑스레이 필름, 건전지, 플라스틱, 자전거 바퀴, 비닐 파이프 등 구체적이고 산업적인 재료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후작가회 또한 이러한 위기 아래에서 추상 이후의 전위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미학을 제창하였다.

이후 작가전에는 강선보의 「영역 침범」, 김동규의 「고속 도로 5번」, 「도시 계획」, 이용길의 「매물(賣物) 198원, 20원, 202원, 203원 견본(見本)」, 「짝지은 부부 내내 행복할 지이다」, 「어지러운 십자로(十字路)」, 김인환의 「작품 1, 2」, 김종근의 「연속 1, 2」, 양철모의 「재미없는 미학」, 김홍규의 「생태(生態) ♂」, 「생태 ♀」, 김홍석의 「연탄가스 축제」, 「담배 태우는 연기」, 조철수의 「부재(不在)」, 「.△.」, 김청정의 「탕아(蕩兒) 돌아오다」, 「표본된 구체(球體)」,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가 출품되었다.

당시 출품된 김청정의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와 김동규의 「고속 도로 5번」은 라이트 아트로 볼 수 있는데, 당시 부산 전시관의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건전지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시현이 어려웠다. 조철수는 링거병에 색물감을 넣어 투명한 비닐 호수에 흐르게 한 오브제[사물] 작업을 보여 주었고, 이용길은 수학에서의 오브제를 원리로 기하학적 문양을 거듭 찍어 내는 실험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이후 작가전은 회화나 조각을 넘어서는 다양한 실험들을 보여 주었다.

[의의와 평가]
이후 작가전은 구상풍의 회화나 조각이 지배적이던 부산 화단에서오브제 아트라는 새로운 실험을 보여 준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전시에 대해 『부산 일보』는 “이후 작가전을 일컬어 대중 속의 미술”이라 평하였다. 미술을 그림이나 조각으로만 간주하던 당시 풍토에서 이후 작가전은 기성의 오브제를 사용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이후 작가전에 대해 미술 평론가 김강석『부산 일보』[1968. 4. 20]에 투고한 글에서 “우리 화단에는 네오 다다 이후의 새로운 미술이 간절히 요청되고 있으나, 그것은 표피적인 제스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적 계기에 의한 필연적 과정에서 노정된 결실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 때 이들은 기술의 미숙, 내용의 공허, 그리고 무턱 대고 수락한 남의 조형 양식 등으로 허다한 난점을 내재하고 있다. 개별적인 작품을 두고 말할 것이 없는 것은 아쉬우나 그 가운데서는 김청정의 「탕아 돌아오다」가 가장 나은 셈. 대부분의 작품들은 재료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실험 그 자체로 끝나고 있다. 이들이 보다 나은 차원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탐구와 기교의 연마가 요청된다”고 평하였다.

김강석의 평론에 따르면 이후 작가전에서 작가들은 새로운 실험을 하고자 하였지만, 이들의 작품이 내적 계기를 통한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형식을 탐미하는 데에 그쳤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보다는 기존의오브제 아트를 답습한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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