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매축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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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4476
한자 釜山鎭埋築工事
영어의미역 Busan-jin Reclamation Project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범일동|남구 우암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이근

    [상세정보]

    성격 매축 공사[매립 공사]
    관련인물/단체 조선기업주식회사|아사노 소이치로[淺野總一郞]|부산진매축주식회사|대창매축회사|나고야조선기업주식회사
    전개 시기/일시 1913년 3월 31일연표보기 - 제1기 매축 공사 착공
    전개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 제1기 매축 공사 준공
    전개 시기/일시 1925년 - 제2기 매축 공사 허가권 승인
    전개 시기/일시 1926년 11월 1일연표보기 - 제2기 매축 공사 착공
    전개 시기/일시 1932년 12월연표보기 - 제2기 매축 공사 준공
    전개 시기/일시 1939년연표보기 - 제3기 매축 공사 준공
    발생|시작 장소 부산진 매축 공사 장소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동구 범일동|남구 우암동
    종결 장소 부산진 매축 공사 장소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동구 범일동, 남구 우암동
[정의]
1913~1939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남구 우암동 부근 바다를 매축한 공사.

[역사적 배경]
대륙으로의 전진항인 부산 지역은 개항 이후 점차 활성화되었지만, 초기 부산 지역의 도시 공간은 용두산 부근으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부산 지역의 활동 공간을 북동쪽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부산진 매축 공사(釜山鎭埋築工事) 이전에 이미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일대를 매축한 북빈 매축 공사가 이루어졌으나, 군사적·산업적으로 중요한 부산 지역에 더욱 넓은 공간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군사 시설, 철도 및 도로 시설, 그리고 산업 시설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부산진 매축 공사가 실시되었다.

[경과]
부산진 매축 공사는 1, 2, 3기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제1기 부산진 매축 공사의 시행 기업은 조선기업주식회사[1912년 9월 설립된 일본인 회사]였다. 조선기업주식회사부산항의 북부인 구관(舊館)[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두모포 왜관이 있던 곳]에서 부산진(釜山鎭)에 이르는 약 132만 2314㎡[40여만 평, 실제 측량 결과 약 184만 5124㎡(55만 8150평)]를 40만 원에 매입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축 하가를 받아 1913년 3월 31일 제1기 매축 공사를 착공하였다. 1917년 준공으로 약 47만 6655㎡[14만 4188평]의 매축지가 생겼다. 제1기 매축 공사 이후 조선기업주식회사는 회사의 형편상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아직 착공되지 않은 나머지 부산진 매축 공사를 심의 중이던 조선총독부는 1925년 8월경 아사노 소이치로[淺野總一郞] 등 3명에게 약 112만 3967㎡[34만 평]의 매축 사업을 허가하였다. 이들 3명은 일체 권리를 부산진매축회사[1926년 창립]에 넘겨 부산항 개항 50주년을 맞는 1926년 11월 1일 제2기 매축 공사 착공식을 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매립 공사 착공식에 참석할 정도로 이 공사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자본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제2기 매축 공사로 전체 매립지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53만 5702㎡[16만 2050평]가 1932년 12월에 준공되었다. 나머지 약 49만 9802㎡[15만 1190평]의 매축은 1938년 8월을 준공 예정일로 한 제3기에 이루어졌다. 제3기의 준공 일자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늦어도 1939년 4월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부산진 매축 공사를 끝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부산진 매축 기념비(釜山鎭埋築紀念碑)[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2동 1-4번지 부산동부경찰서 정문 옆 화단에 위치]가 1939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2기와 제3기에 참여한 회사는 약 60만 원을 투자한 대창매축회사(大倉埋築會社), 200만 원을 투자한 나고야조선기업주식회사[名古屋朝鮮企業株式會社], 그리고 300만 원을 투자한 부산진매축회사이었다. 부산진매축회사가 제2기와 제3기 공사에 해당하는 매립 허가를 받은 매립 지역은 지금의 동구 범일동과 남구 우암동 앞바다를 포함한 약 99만 1736㎡[30만 평]이었다.

[결과]
제1기 공사로 획득된 매립지에는 철도와 국도, 경비 창고 및 각종 회사가 들어서 이 지역은 군사·행정·산업에서 주요 지역이 되었다. 제2기와 제3기에 매축된 동구 범일동 지구는 철도 연락이 편리하여 공장 지대로 유리한 자리였다. 제2기로 매축된 지역에는 미곡 창고, 철도 관사, 경창서, 우편소, 초량역, 부산진역, 학교 등이 들어섰으며 무엇보다도 이 지역은 1930년대 이후 부산의 중요 공업 지대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제3기의 매축지는 중일 전쟁 등으로 수요자가 나타나지 않아 빈터로 남아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 매축 공사로 군사 기지와 산업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매립지의 확대와 부산 지역의 활동 공간의 확대는 부산의 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일제의 식민지 한국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대륙의 관문으로서의 부산 시가지 확대는 대륙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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