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착평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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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4478
한자 釜山鑿平工事
영어의미역 Land Trimming Construction in Busan
이칭/별칭 영선산 착평 공사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이근

    [상세정보]

    성격 매축 공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9년 5월 15일연표보기 - 착공
    종결 시기/일시 1912년 8월 31일연표보기 - 준공
    전개 시기/일시 1910년 4월 1일 - 일본인 청부업자에게 시공권 이전
    발생|시작 장소 부산 착평 공사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종결 장소 부산 착평 공사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동구 초량동을 연결한 해면 매축 공사.

[역사적 배경]
1902년에서 1909년까지의 북빈 매축 공사[부산 북항 매축 공사]로 확보한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일대와 동구 초량동 사이에는 해발 약 9m의 영선산(營繕山)과 해발 약 36m의 영국영사관산(英國領事館山)[영국이 조차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가로막고 있었다. 북빈 매축 공사로 일본인 거류민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긴 하였지만 일본인의 활동 공간이 여전히 좁은 편이었고, 당시 초량[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종점이 있었던 경부선 철도와 부산항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항만과 철도의 연결을 위한 해면 매축 공사로 부산 착평 공사가 시행되었다.

[경과]
부산 착평 공사는 1909년 5월에 부산 지역 일본 거류민단의 청원으로 시행되었다. 1909년 5월 15일부터 1910년 3월 31일까지 대한 제국이 직영으로 시공하였다가, 경험 부족으로 일본인 청부업자에게 공사를 넘기게 되었다.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은 깎여 평지가 되었으며, 그 산의 토석으로 초량과 제1 부두 사이의 호안(護岸)[유수에 의한 물가선의 침식을 방지하는 공작물]과 물양장(物揚場)[수심 4.5m 이하의 소형 부두, 계류 시설] 매립 공사가 동시에 시행되었다. 1910년 4월 1일부터 1912년 8월 31일까지 29개월간 약 60만 6768원의 공사비로 청부 계약을 맺은 일본인 청부업자에 의해 부산 착평 공사가 준공되었다.

[결과]
공사의 완료로 약 14만 8033㎡[4만 4780평]의 평지를 얻었다. 공사에 소요된 총공사비는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105만 1500원이 되었다. 부산 착평 공사로 인해 초량 종점의 경부선 부산 본역이 중앙동의 세관이 있는 제1 부두 쪽까지 뻗어 나오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부산항경부선 철도의 연계가 가능해졌다.

[의의와 평가]
일본인 거주 지역인 현재의 부산광역시 중구 지역과 동구 지역인 초량·부산진이 연결되어 부산 지역의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준공으로 인한 경부선 철도와 부산항만의 연결은 일본~한국~중국 사이의 물자와 인구의 원활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나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 공고화와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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