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만 매축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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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4214485
한자 赤崎灣埋築工事
영어의미역 Jeokgiman Reclamation Construction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감만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석만

    [상세정보]

    성격 매축 공사
    관련인물/단체 이케다 스케타다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4년 4월연표보기 - 착공
    종결 시기/일시 1944년 12월연표보기 - 완공
    전개 시기/일시 1937년 8월 - 제1기 적기만 매축 공사 준공
    전개 시기/일시 1940년 2월 - 제2기 적기만 매축 공사 준공
    전개 시기/일시 1939년 7월 - 제3기 적기만 매축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3년 12월 - 적기만 매축 기념비 건립
    발생|시작 장소 적기만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발생|시작 장소 적기만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종결 장소 적기만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종결 장소 적기만 매축 공사 -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감만동에 해당하는 적기만 일대에서 진행된 매축 공사.

[역사적 배경]
적기만 매축은 1920년대 중반 부산진 매축 계획의 한 부문으로 매립 면허권이 부여되었다. 매립권을 받았던 부산진매축주식회사는 부산진과 적기만의 약 115만 7000㎡를 매립하여 항구와 연계된 임해 공업 지대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의 장기 불황과 대공황이 이어지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1933년 이후 대공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경제가 호황 국면에 접어들고, 영도의 석유 시설 이전 등의 토지 수요가 대두되면서 적기만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발수요를 감지한 매축업자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가 부산진매축주식회사로부터 적기만 매립권을 양도받아 1934년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경과]
적기만 매축 공사는 일본인 자본가 이케다 스케타다남항 매축 공수에 이어서 착수한 매축 공사로 1934년 4월부터 1944년 말까지 총 3기에 걸쳐 약 11년간 진행되었다. 1934년 4월 말에 시작된 제1기 매축 공사는 우암동 해안가, 일명 적기만으로 부르는 지역을 매립하여 1937년 8월에 준공하였다. 제1기 공사를 통해서는 335,494.215㎡의 새로운 부지가 조성되었으며 공사비는 125만 엔 정도가 사용되었다.

제2기 공사는 적기 반도 해안가의 61,745.4545㎡를 매립하였다. 1940년 2월 준공하였으며 공사비는 55만 엔이 들었다. 제3기 공사는 부두 시설[현재의 8부두]을 건설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적기 반도 해안가에 추가로 105,785.124㎡를 매립하기 위해 1939년 7월 착공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의 자재난, 인력난으로 공사가 대폭 지연되어 1944년 말에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전시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아 225만 엔이 소요되었다.

[결과]
11년간 3기로 나누어 진행된 공사를 통해 부산진 동천에서 우암동, 적기 반도에 이르는 해안가에 519,186.777㎡의 부지가 매립되었고, 이를 위해 405만 엔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조성된 부지는 이케다 스케타다 스스로 석유 회사 설립을 위해 보유한 지역을 제외하고 동양척식, 일본목재, 조선연탄, 조선운송 등 총 19개 업체에 매각하여 공장 용지 등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 12월에는 매축 공사 완공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이케다 공덕비와 함께 세워졌다. 실제 적기만 매축 완공 기간보다 1년이 앞당겨져 기념비가 세워진 이유는 부산진역에서 적기만 매립지를 가로질러 적기역[해방 후 우암역]에 이르는 임항 철도가 완성된 것을 계기로 이 철도 부설의 기념을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적기만 매축 공사를 통해 동천 건너편 우암동·감만동 일대가 부산항에 편입되어 항만이 크게 확장되었다. 전시 체제기로 전환되면서 필요해진 군사 항으로서의 기능 강화 역시 적기만 매축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적기만 매축 공사는 현재의 부산항 6, 7, 8부두의 원형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생성된 부지에는 주요 기업들이 입주하여 임해 공업 단지가 조성됨으로써 공업항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기존 도시 기능을 분담하는 부도심의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1930년대 이후 급격하게 대두된 도심 과밀화 현상을 완화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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